공심으로 살아온 생애

생각은 3년 전으로 돌아간다. 불행하게도 나는 불의의 사고로 서울 명륜동 어느 병원에 입원하였었다. 그날이 바로 1월 9일,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편지가 왔다. 그것이 바로 육타원 스승님의 다정다감한 위로의 글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하여 짐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몸은 비록 병원에 누어있으나 마음은 육타원님을 뫼셨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아른거렸다. 금강원 일우에 계실지언정 동서남북에서 총부를 찾는 동지들에게 한결같은 덕화로 말씀 없는 가운데 교화하시고, 감싸주시던 일. 짐승을 사랑하시되 「사람은 제 스스로 살펴 먹을 줄 아나 말 못하는 짐승들은 사람이 안 챙겨주면 먹을 줄을 모르니 불쌍한 중생 아니냐」하시며 손수 지극한 사랑과 보호를 하시고, 풀 한 포기 화초 하나하나에도 기름지고 무성한 꽃을 피우게 하시던 일들은 사생에 일신인 것을 분명히 깨치신 대자비심의 덕화가 아니고는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동지들의 말못할 어려움과 비밀을 감쪽같이 처리해 주시고, 더욱이 아프고 부족한 사람일수록 소리 없이 챙겨주시고 키워주셨으며, 출가 40여 성상을 두 마음 없이 대종사님께 신심을 바치시고 역대 종법사님께도 한결같이 받들었던 그 정성과 신심 공심은 따를 수가 없었다.
스승님의 훈훈한 사랑과 따스한 보살핌을 생각하면서 2, 3일이 흘렀다.
어느 날 주위의 방문객 몇몇 분들이 수군수군하시는 눈치가 심상치 않는 예감이 드는데, 선생님들 몇 분이 총부 가실 일이 있다고 한다.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내 예감이 맞은 것이다.
오호라- 육타원 스승님의 열반 비보는 내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울었다. 하늘도 땅도 꺼지는 듯 내 마음은 허망하고 서글펐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눈물이 가리워 몇 번이고 펜을 멈췄다. 육타원 스승님의 체취가 감도는 총부도량에서 지금 나는 살고 있다.
나는 육타원 스승님의 사랑이 아쉬워졌다. 그러나 육타원 스승님의 열반에 드신지 벌써 3년.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하였나? 부끄럽다.
말씀이 적으시면 서도 알뜰하신 스승님. 재가· 출가· 남녀· 노소를 통하여 스승님의 정신 미치지 않으신 바가 없으셨다. 육타원 스승님의 숨은 미덕이 알고 모르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따르기 어려운 점 꼭 배워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나를 남보다 더 드러나게 하려하고,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며,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육타원 스승님은 내 공은 숨기시고 남의 공을 드러내어 상 주려 하시고 남의 과실은 당신의 과실처럼 여기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알까 두려워하시던 덕행.
뒤에 숨어서 힘 밀어 주시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쌓으신 음덕은 여래심이 아니시고는 있을 수 없다고 느껴진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여러 사람에게 수고 끼치지 않고 잠들 듯이 떠나야 할텐데」하시더니 병환 나신 사십 삼시간 1월 18일 훌훌히 떠나신 것이다.
16일 조반 식탁에서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하는 지라 영원무궁한 일원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 고락을 초월하자」고 설하시어 후진들에게 법락을 얻게 해주셨다고 한다.
지금도 잔디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날 때면, 금강원 정원에 탐스런 장미가 피어날 때면, 스승님의 해맑은 미소처럼 스승님의 인자하신 손길처럼 나를 착각하게 만든다.
스승님이 떠나신지 3년. 대지위엔 하얀 눈으로 소복을 하고 있다. 가슴을 후벼도 땅을 쳐도 시원찮았던 그 날이 지금은 옛날이란 추억 속에 잠겨있다.
이젠 나도 스승님이 남기신 교훈을 받들어 성불제중의 목적을 향하여 정진하고 이 회상에 보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새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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