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기 따라 베푸는 교화법

한 제자가 조주스님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있다면 어째서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범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제자가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일체중생이 모두가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개는 어째서 '없다' 합니까?"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묻는 사람에 따라 똑같은 질문을 전혀 다르게 답한 대표적인 예다.

진리는 고정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우침을 줄 때에도 상황에 따라 묻는 이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며 처한 상황 또한 똑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화하는 방법도 일률적으로 고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은 근본이요 육신은 말(末)이라 하지만 한 끼 밥이 없어 굶는 사람에게 정신만을 주장하여서는 교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천만 사람에게 맞는 천만 방편으로 법을 베푸셨다. 비유하면 가지와 잎에서 시작해서 뿌리에 이르게도 하시고 뿌리로부터 시작해서 가지와 잎에 이르게도 하셨다. 즉 진리의 근본에서 시작해서 삼라만상의 현상에 이르고 삼라만상 각각에서 부터 시작해서 근본에 이르게도 하셨다.

우리 교리로 하면 일원상의 근원적 진리에서 시작해서 사은사요 삼학팔조 등 세세한 덕목에 까지 이르고 세세한 덕목에서 일원상 진리의 본질에까지 이르도록 하셨다.

시비이해의 일이 대소유무의 이치에 이르고 대소유무의 이치가 시비이해의 일에 까지 꿰어지게 하셨다. 뿌리에서 시작하였으나 가지와 잎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지나 잎에서 시작하였으나 뿌리에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의 근원적 원리가 삶의 현실로 꿰어지지 못하고 사회 현상의 일들이 진리의 본질과 괴리되기도 한다.

근기에 따라 각자의 눈높이에 맞게 적중하여 법을 베푸는 원융무애의 교화법은 일체 생령을 제도하되 만능이 겸비하며, 천만 방편으로 수기응변하여 교화하되 대의에 어긋남이 없으면서도 교화 받는 사람으로서 그 방편을 알지 못하게 하는 여래위의 경지이다.

대종사님과 같은 여래의 교화방편은 어려워도, 적어도 교화자라면 본질과 현상이 괴리되게 가르치거나 어느 한 면에 고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성지송학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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