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해탈
원불교의 해탈관 중심으로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진리는 인간을 통해서(覺者) 더욱 뚜렷하고 영향이 확대
해탈은 비진리적 인간 상태에서 진리적 인간으로 승화

 「해탈한 사람의 심경은 범상한 생각으로 측량하지 못할 바가 있나니 무슨 일이나 그 일을 지어갈 때에는 천만년이라도 그 곳을 옮기지 못할 것 같으나 한번 마음을 놓기로 하면 일시에 허공과 같이 흔적이 없나니라」 이 말씀은 대종경 전망품1장에 있는 말씀이다. 생체에 있어서의 모든 세포조직이란 독립성과 관계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 세포의 생존이 모든 다른 세포군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체뿐만 아니라 우주의 소재인 물질의 구성에 있어서도 근본적 입자상과 본질적 결합상이 공존하면서 물질에 있어서 제3의 면이라 할 수 있는 에네르기의 작용, 따라서 존재와 변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인간의 사회성과 논리성에도 도입된다. 사회란 독립된 하나하나의 인격의 집합체요, 윤리란 공동사회 규범임과 동시에 우리 모든 개개인의 안전이다. 그러므로 「○○집단 속의 나」「나를 통한 ○○집단」이 가능한 표현이다. 이러한 원리는 다시 진리세계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만유란 모두 진리속의 만유다. 진리란 전체적일 것이요, 보편적 원리라 이러한 진리를 외면한 모든 존재란 불가능하다. 잠정적 가능이 성립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다. 진리 또한 이러한 개개의 만유를 외면하여 존재할 수 없다. 만유와 더불어 존재가능하며 진리능력이 구현된다. 이러한 논리는 다시 「진리속의 인간」이란 개념을 탄생시킨다. 인간 역시 진리를 외면하고 살 수 없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밀접한 관계이다. 진리 또한 인간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覺者)을 통해서 더욱 빛나며 그 영향은 더욱 확대된다. 그러므로 비진리적 인간 상태에서 진리적 인간으로의 승화가 해탈이다. 진리적 인간이란 모든 진리성을 각득하여 인간성으로 회복, 모든 현실을 통치해 가는 자세요, 능력이다. 인간이란 진리속의 인간임과 도시에 「현실 속의 인간」이다. 인간의 그 많은 생존조건 현실들은 모두 필요불가결한 것들이다. 이 필요불가결한 것들은 다시 그 필요에서 안하무적의 강자로 군림하여 인간성을 속박한다. 속박된 인간은 천부의 자유를 잃게 되어 재색명리 등 비진리의 명령에 굴종이 있을 뿐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도리, 국민으로서의 도리, 부모ㆍ자녀ㆍ형제ㆍ부부로서의 도리, 친구로서의 도리는  아랑 곳 없다. 오직 그 명령이 있을 뿐이다. 이 명령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가릴 것 없다. 예의도 염치도 없다. 隱과 顯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온 방죽을 혼탁하게 하여 자타 간에 괴로운 苦만 장만한다. 이것이 속박이요, 속박된 현상이며 결과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초극한 내용이 바로 해탈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의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소이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불법에도 묶이지 않는 것이 참 불법(佛法佛法者 卽是佛法)이라 하고 있다. 불법에 대한 속박도 가차 없이 일봉을 가하거든 항차 재색명리의 비법에 대한 속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해탈은 진리에 대한 의미 부각으로 자기본질의 회복에 있다. 진리란 자기 속의 권외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기 속의 자체로 본질로 대체되어야 한다. 자기 속에는 오직 진리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요,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참 해탈이요, 이렇게 될 때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그러나 모든 공덕의 慈雨는 자타의 대지위에 흠뻑 적시운다. 그리하여 이 땅은 은혜고 충만한 낙원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은 한 때의 필요성 인식 정도로 획득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단한 수행적공의 노력의 대가로서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소명에 절대순종하며(循) 진리적 여건과 내용을 최대한 활용하는(率) 능력을 가갖추었을 때 완전한 해탈은 가능해진다. 대종경 불지품6장에서 중용의 솔성지도를 해석하시는 말씀 가운데 천도에 잘 순응만 하는 것은 보살의 경지요, 천도를 잘 사용하여야 부처의 경지이니 비하건대 능한 기수는 좋은 말이나 사나운 말이나 잘 부려 쓰는 것과 같나니라. 그러므로 범부중생은 육도의 윤회와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지마는 부처님은 천업을 돌파하고 거래와 승강을 자유자재하나니라. 또는 대종경 불지품4장에 보면 불보살들은 행, 주, 좌, 와, 어, 묵, 동, 정간에 무애자재 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두울 때에 어두우며 능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 하셨으니 이것이 해탈의 궁극적 능력이요, 발현이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휴머니즘의 극치요, 실존주의의 궁극적 이상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천, 지, 인의 삼재에 참예하는 인간,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 되며 이것이 인생의 참다운 의미이다. 이에 본교에서는 이와 같은 해탈을 위해 정신수양의 공부법과 함께 사리연구 작업취사 등 삼학의 제시로 구체적인 수행력법 방안을 마련했다. 이러한 방법과 방안에 입각한 단련을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 하여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으로 인간개조와 본래 인간성회복 등으로 인한 참다운 해탈을 얻어 가도록 했다. 이와 같이 해탈이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요, 실제적인 수행 작업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노예상태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대자유의 해방은 보장된다. <교무부장>
<사진> 영산성지 대종사 대각터에 세워진 대각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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