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종교의 중심지>

전북 김제군 금산면 모악산 일대는 충남 계룡산 신도안 일대와 더불어 한국 유사종교의 2대 중심지이다.
현재에도 금산사 주위에는 천지개벽과 자기들만의 구원을 믿는 유사 종교 신도들이 초라한 생활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에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용화 교주 서백일씨나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여러 채의 집들만이 덩그렇게 즐비해 있는 동도교 본부(강증산 계)는 가히 신흥종교의 압권이라 할 것이다.
이곳도 신도안처럼 경상도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걸어서 금산사를 찾는 사람에겐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저수지 아래 원평은 금산사 주위와는 너무나 판이한 분위기다. 원평은 시골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금산면 봉남면 감곡면의 접경지대이고 또 김제군 정읍군 완주군의 접경지대이기도 해서 원평은 소비 시장으로서 매우 시끄러운 장터이다. 그래서 주민들도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고 저수지 위에 금산사 일대의 분위기에는 냉담한 표정이다.
<대종사님과 선진님>
원평 땅에 원불교가 들어온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원기 7년경 대종사님께서 부안 봉래정사에서 수양하시면서 이곳 금산사에도 들르게 되었다. 금산사 한 모퉁이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팔산 선생님과 함께 몇 달을 조용히 지낸 일도 있었다.
당시 강증산 신도였던 구남수 이만갑 송적벽 장정수 장적조 선생 등 여러 선진들이 이곳에서 대종사님을 뵈옵고는 제자가 되었고, 원평 땅에 교당을 세울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 원기 10년 3월경이었다. 현 재무부장인 성정철 선생님도 경상도에서 모악산 부근으로 넘어와 있다가 이곳에서 장적조 선생님으로부터 대종사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평생을 원불교에 바치게 되었다고 한다.
원기 10년 여름부터 김원형씨(이만갑씨 아들) 조송광 선생(조전권 선생 부친) 집에서 5년간 출장법회를 보아왔다. 그러다가 원기 15년 7월에 9간초가 2채를 구입해서 출장소를 개설하고, 17년 4월에 박대완 선생이 초대 교무로 부임해 왔다. 초대지부장은 조송광 선생이었고 20년 4월에 지부로 승격되었다.
<교단과 더불어>
이후 원평을 거쳐간 교무는 김광선, 오창건, 조갑종, 조원선, 김영신, 이운권, 송벽조, 양혜련, 장성진, 이정만, 전이상 선생 등 교단의 기라성 같은 선진들이 40여 년간 일원의 법음을 전파했다. 현재 교무 전종철 선생과 부교무 박찬면 선생이 부임하기는 54년 4월이었다.
회보를 펼쳐보면 당시 원평 교당의 활동상황은 다른 어느 교당보다도 훨씬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대 결산을 할 때에도 45명이나 되는 거진출진을 배출했다.
원평에서 나온 전무출신만 보아도 조전권 조만식 조일관 고현종 송자명 이종명 김인석 조정근 김법진 회순철 김지영 김화경 이명인 신귀성 유일봉 온화중 조명심 최인학 송선만 전봉선 전종철 씨 등 20여 명을 훨씬 넘는다.
대종사님과 여러 선진님 그리고 수십 명의 전무출신의 숨결이 어린 원평은 어쩌면 한 개 교당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산이나 부안 봉래정사와 더불어 우리 교단의 발상지로서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금산 요양원>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화병원의 시초였던 금산요양원도 원평 교당에서 출발했다. 27년 10월에 현재 금평 저수지가 된 금산리에 과수원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원평 지부는 이름조차 금산지부로 바뀌었고 34년에는 금산 요양원을 과수원 터에서 개설하게 되었다. 금산 요양원은 현 대산 종법사께서 이곳에서 휴양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35년에 6·25를 당하고, 곧 요양원 터가 저수지로 들어가게 되어 총부로 옮겨 북일 진료소로 되고 다시 동화병원이 되었다.
교당도 37년 5월에 현재의 금산면 쌍용리로 옮겼으니 교당터는 뽕나무밭이었다.
<새 법당 마련>
43년에 이르러 이정만 교무 때 금산지부가 다시 원평 지부로 환원하게 되었다.
48년 11월 22일에 현재의 법당을 신축하고 봉불식을 거행했는데 교무는 이정만 선생, 지부장은 조동오 선생, 신축 기성 회장은 신경오 선생이었다.
현재 원평 교당은 대지 1천 8백여 평, 42평의 법당, 54년에 신축한 13평의 별당 , 55년에 신축한 30평의 식당, 이렇게 해서 넓은 대지에 법당 별당 식당을 다 갖추었다. 신작로에서 법당까지의 30여 미터의 길 양쪽에는 관상목이 심어져 있고 법당 주변에도 나무들이 있어 상당히 수양터답고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모악산 일대의 정기며, 교당 주변의 분위기는 훈련도량으로서도 기대해 봄 직하다. 50여 명 정도의 집단 수련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각종 연구에 전심하기에도 알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원평 교당이 가진 오랜 역사와 선진들의 발자취, 현재의 교당이 가지고 있는 대지나 건물은 곧 원불교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원평 교당은 우리 교단 초창기 영산 신흥 다대등과 더불어 주역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도시교당의 진출로 차츰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산이나 신흥이나 다대 등이 현재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이지만, 원평은 옛날처럼 번창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런대로 평균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용신 화해 금구의 세 교당을 분가시켰고, 전주까지가 50리, 태인까지가 20리, 용신까지가 15리, 금구까지가 20리, 감곡까지가 10리의 거리 또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게 산골도 아니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원평 교당은 평균 수준의 교세를 지켜나가기에는 별로 어려웁게 보이지 않는다.
입교한 교우 수를 보면 1대에 남자 290명, 여자 436명, 2대에 남자 262명, 여자 373명으로 1,400명이 가깝다.
법회 출석자도 평균 60~70여 명인데 여자와 남자의 비율은 3:1 정도이니 비교적 남자 출석이 많은 편이다.
지난번의 재가 교우 법위사정 때에도 70여 명이 대상이 되었고, 대종사님을 직접 뵈온 분들도 몇 분 살아있다.
원평 교당은 원불교 초창기의 어머니 교당이면서 도시 교당의 진출로 옛날처럼 번창하지는 못하나마 그런대로 상당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많은 전무출신을 배출한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건전한 종교>
현재 원평에는 원불교와 예수교 천주교 동도교가 있다. 인구에 비해 교회는 적은 편이다. 소비시장으로의 특성을 가진 때문이지는 몰라도 주민들의 종교열은 비교적 소극적인 편이다. 금산사 일대의 유사종교에는 별 관심도 없고.
그러나 원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건전한 종교로 받아들인다. 원평 지방의 종교 주역은 원불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나 천주교까지도 이러한 원불교의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매우 우호적이고 협조적이다. 그래서 원평에서는 종교의 연합 전신이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청년회 학생회 활동이 어렵고 교우들의 질적 수준이 교화단 활동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 한다. 이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인지는 사회상황에 크게 좌우될 것 같다.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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