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저축, 상조조합에서
저축조합, 숯장사로 자금 만들어
사회의 예상을 뒤엎은 방언사업

대종사 대도를 이루시고 세계의 움직임과 인심의 동향을 관찰하시고, 한국 사회의 세계의 잘못되어 가는 원인을 꿰뚫어 파헤쳐 보셨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제생의 강령을 밝히시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 세계 구원의 요강을 완성하시니, 이가 바로 삼학팔조요 사은사요인 것이다.
이에 대 회상의 문을 열으실 것을 내정하시고, 건교의 첫 포석으로 저축조합을 설립하셨다.
저축조합
대종사께서 회상 창립의 제자들에게 금주단연, 미신타파, 허례폐지, 수지대조를 명령하셨다. 이를 실행하는 방안으로 각자의 생활에서 근검절약하고 남은 돈을 저축하게 하셨다.
또한 저축조합을 통해 상부상조의 대 협동 정신을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자력과 문명과 공익의 정신을 개발해주셨다. 이를 위해 인간개조 즉 정신개조를(즉 물감으로 표시해가며) 시도하셨다.
이러한 작업을 하시면서 한 때도 떠날 수 없는 각자의 생활에 모든 것을 직결시켜 혁명적 개선을 지도하셨다.
이와 같은 주도면밀하신 사리의 통찰력을 지닌 성자는 일찍이 없었다. 수많은 정치 경제가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대종사님의 산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저축조합이 설치된 지 불과 반년에 저축된 금약이 무려 2백여 원이 되었다.
숯장사
대종사께서도 소유이산 여러 가지 유휴재산(임야, 토지, 가산, 집물)을 처리하셨다. 저축조합의 자금이 4백여 원으로 늘어났다.
대종사 당시 국내의 물가 동향과 전망을 두루 살펴보셨다. 무언가 큰일을 구상하셨다. 외채 구득의 어려움을 말씀드렸다. 제자들은 대종사의 명에 순종하고 나섰다. 뜻밖에 일로 4백여 원의 거액을 구득하게 되었다. 자금은 총 일천여 원이 확보되었다.
대종사 이 자금을 숯 구입에 총 투자하셨다. 이때가 원기 2년이다. 다음해인 원기 3년에 이 숯을 방출 판매했다. 4백 원의 외채를 원리 상환하고 투자액의 10배가되는 9천여 원이 되었다. 세계 제1차 대전에 일본이 참전하고 물가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종사께서 이 시리를 통찰하신 것이다. 이 숯장사는 대종사의 제1차 사업이다.
우리는 깊이 되새겨보고 검토해 보아야겠다. 교단 경제의 운영을, 교단의 기본 재산을 그대로 사장하고 유휴해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바다를 막다
대종사 제1차 숯장사에 성공적인 수확을 보시고, 9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는 일찍이 중인의 버린 바라. 우리가 방언을 하여 논을 만든다면 불과 수년에 완전한 토지가 될 뿐 아니라, 폐물이용으로 인하여 비록 적은 토지이긴 하나 또한 국가 사회의 생산 활동에 한 도움이 될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개척 사업에 노력하여, 처음부터 이 공익의 길을 우리의 힘으로 시범함이 어떠한가.」
9인 제자 이에 이구동성으로 순종한지라, 이에 특별히 마음을 다짐하기 위해 서약서를 작성케 하시고, 함께 천지신명께 서약서를 낭독하고 불 살러 하늘을 두고 이 사업의 완수를 맹서하셨다.(참고, 정산종법사의 「창건사」)
이러한 절차와 정신적 의의를 깊이 새겨주시며 착수한 방언공사는 당시 영광 사회의 예상을 뒤엎고 만 1년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여기 제2차 사업에 얽힌 교훈을 또 한 번 되새겨 깊이 생각하고 검토해보자.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아예 염두도 내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사람을 호사객으로 소외하기 쉬운 풍조가 없지 않는가. 아홉 분의 어깨와 등과 다리로 한 길 깊은 바닷물을 막아 논을 만들어낸 대모험을 야릇한 창립의 얼이라고 찬미하는 감상에서 벗어나, 이제 더 많은 난제를 헤쳐 나갈 개척의 발발하고 견인하셨던 산 정신을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제1차 제2차 사업을 수행하면서도 저축조합의 근검저축과 생활개선운동은 더욱 알차게 지속되어 왔다. 그 뒤 대종사께서 봉래정사에 주석하시며 회상건립의 준비 작업을 하시다가 원기 9년 4월에 현 익산 총부에서 비로소 불법연구회라는 임시교명으로 교단의 정체를 내외에 선포하시며 영산에 있던 저축조합을 상조조합부로서 발전시키셨다.
상조조합
당시 상조부 규약에 보면 그 머리말에서 「과거 도덕가에서 인생생활에 최대강령인 농공상의 원 직업을 등한시하고 오직 의뢰생활에 그쳐왔으나 현 세상에 있어서는 자력이 아니고는 살수가 없음으로 이에 농공상의 원 직업을 규칙적으로 장려도 하며 또는 본회의 한 기관으로서 영리적으로 정하여 상조부라 명칭하고 본회의 은행과 같이 각 기관의 자산을 통일하여 영리의 책임을 주었으며 일반 회원의 모든 저축을 장려하여 본회의 교리와 제도를 운전하는 데에도 결함된 점이 없도록 하기로 한다.」라고 명시했다. 이로써 본다면 종래의 저축조합을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 합리화하고 체계화하여 상부상조하는 자리이타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역점을 두신 것이 바로 상조조합이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규약 제2조 목적에서 보면 「본 조합은 본회 각 기관의 자사를 통일하여 영리를 하기로 하여 일반 회원의 근검저축을 장려하여 공부 사업 생활 삼 방면에 편익을 도와주기로써 목적한다.」라고 밝혀있다.
대종사께서는 교단 창립의 경(5면 하단으로 이어짐)

(4면 상단에서 이어서)
⑤ 귀영바위
노루목에서 10분.
대종사님께서 20세 되시던 해에 구동에서 이곳에 이거 하시어 노루목 대각지로 다시 이거 하시기까지 만 4년간 살으셨던 곳이다. 사실 때가 대종사님께서는 스승 만나시기를 단념하시고 정에 드셨던 때이다.
집터가 흐트러져있다. 집터 정리가 시급하다. 작은 푯말 하나라도 있어야겠다. 정원수도 가꾸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앞에 있는 밭은 시급히 구입해야겠고.
⑥ 구동
귀영바위에서 15분.
대종사님께서 10세 되시던 해에 영촌 성탄지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시어 20세의 귀영바위로 이거 하시기까지 만 10년간 살으셨던 곳이다.
이곳에 살으실 때 삼밭재 마당바위까지 기도를 4년간이나 다니셨고 이 집에서 결혼도 하시고 부친상도 당하셨으며 스승을 만나기 위한 시련도 당하셨던 집이기도 하시다.
물론 여기에도 집이 허물어지고 없다.
기리세 빛내세 하면서도 성지를 이렇듯 두어둠은 왠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⑦ 삼밭재 마당바위
구동에서 30분,
유명한 삼밭재 마당바위 기도봉이다. 길이 소삽하다. 성지개발협의회에서 이 길을 성역도로라 하고 노력 동원하여 길을 만든다고 한다. 반백년 사업회에서도 예산이 얼마큼 책정되었다고 한다. 꼭 해야 할 일이다.「구름은 어데서 와서 어디로 가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찌 저렇게 친할꼬.」
우주자연 현상과 인생문제에 대하여 깊은 의심을 내시고 지내시던 대종사께서는 10세 되시던 10월 5일 부친을 따라 시제에 참석하셨다가 산신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매일 이곳에 와 기도를 드리기 만 4년, 그 때의 그 정성이 법계에 감응되었기 후일에 대각을 이루시게 되지 않았을까.
마당바위에 이르면 바람도 물도 시원하다. 대종사님께서 기도하실 때 청수로 쓰셨다는 샘물이 있어 더욱 시원하다. 이 샘을 보다 샘답게 손질했으면 좋겠다. 몇 백 명의 순례자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게끔 물의 양은 충분하기만 하다.
삼밭재 마당바위! 시원스런 팔각정이 세워졌으면 싶다. 바람도 쉬어가고 산신도 쉬어가고 그 호랑이도 쉬어가게 말이다.
⑧ 응암바위
교단사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마당바위에서 30분쯤이나 걸릴까?) 그러나 이곳은 영산의 정문이나 다름없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서로 얽혀있는 모습은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몇 백 년 전만 하여도 조수의 양이 많아서 배의 내왕이 빈번하였고 그에 따라 「서해 8경」이라 하여 신선들이 선유를 즐기기도 하였다 하는데 우암 송시열이 다녀간 흔적도 볼 수가 있다.
⑨ 옥녀봉
응암 바위에서 30분.
성지순례길 중 가장 험난한 코스다. 앞으로 삼밭재에서 옥녀봉까지의 길은 시멘트로 계단화 하여야 할 것 같다.
구수산의 큰 정기가 이곳 뭉쳤다는 이야기는 옥녀봉의 외관적인 자태에서 우선 수긍이 간다.
옥녀봉은 우리 교단사에[ 길이 빛날 뿐 아니라 온 세계 인ㄹ로부터 추복을 받아야 할 성지이다. 또한 이 산은 육산 선생님께서 기도 드린 봉이기도 하다.
옥녀봉 기슭에 대종사님 성탄지와 회상 기초를 마련하신 구간도실이 있다.
옥녀봉 상봉에서 중턱에 이르는 몇 단계의 큰 바위, 그를 가리켜 옥녀의 머리와 비녀라 하였다지만 우리의 마크가 여기에 새겨졌으면 싶다. 둥근 일원상이 크게 새겨졌으면 싶다. 노루목에서도, 중앙봉에서도, 언답에서도, 영산원에서도 보일 수 있는 큰 마크가 말이다.
⑩ 성탄지
옥녀봉 바로 밑, 사뭇 내려오면 성탄지가 나온다.
허공법계로부터 온 생령과 온 인류가 길이 축복할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 탄생하신 성탄지이다.
2백여 평의 터가 소박하게 정리되어있다. 몇 그루의 정원수도 심어져있고 길도 그런대로 다듬어져 있다. 언젠가 대학봉사단들의 활동이 컸다고 들린다.
서기 1891년 신묘 3월 27일 박혁거세의 후예이신 박회경 대희사위와 유정천 대희사위 양위분의 4남매 중 셋째 아드님으로 탄생하셨다. 그리고 이 집에서 10세가 되시던 해에 구동으로 이거 하셨다.
집은 보존되어있지 않다. 슬픈 일이다. 여기에 기념탑이 세워진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들이 살아지기 전에 옛 모습 그대로의 집도 고증을 대어 목형을 만들어 놓았으면 좋겠다.
⑪ 구간도실터
성탄지 바로 옆이다. 우리 회상 최초의 회실이다. 원기 3년에 준공하였다. 대종사님과 9인 선배님들께서 각 방에 따로 거처하시며 방언공사와 혈인 기도 등 교단창립의 기초를 닦으신 곳이다.
더욱 아름다운 정원수를 심어 공원화 하여야겠다. 그래서 군데군데 놓여진 자연석에 앉아 옥외법회도 열고.
⑫ 정관평 방언답
구실 도실터에서 5분.
원기 3년 3월에 착공하여 4년 3월에 준공한,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든 곳이다. 이 때 모두 대종사님을 가리켜 비웃음이 많았다.
2차 공사는 원기 40년에 착공하여 44년에 준공했다.
이 방언공사는 대종사님께서 회상을 펴신 후 맨 처음에 시작한 사업으로 새 회상을 펴시는 본뜻을 행과 뜻으로 먼저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 회상 창립 정신의 얼이 담겨있는 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방언답! 후대 만대에 길이 그 정신을 보여주게 될 역사적 의의를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⑬ 선진포
언답에서 15분.
이곳은 대종사님께서 법성장에 가시다가 한 나절을 큰 정에 드셨던 곳.
지금 정자나무 밑으로 두어 채의 집이 생기고 쓰레기 버리는 터가 되었다. 정화작업이 시급하다.
정자나무 밑에서 한 나절을 조용히 사색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하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지순례! 이상의 코스는 하루면 족하다. 또 새벽부터면 오전 중에 마칠 수도 있다. 기도봉을 일일이 순례하려면 이틀이면 되고.
성지순례는 순례한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순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가느냐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훌륭한 시설과 고도의 과학 문명을 이곳에 도입한 인공미의 묘미를 부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지는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지 후진들의 정성스런 흔적은 너무도 부족하다. 다행히 영산원에 있는 세 기관과 성지개발협의회에서 안내판도 만들고 안내서도 만들고 도로도 신설하고 교량도 세운다고 하니 다행스럽기만 하다. 지금의 성지의 상황 아래 성지순례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갈 것인지…(안내 및 자료 제공 영산선원 서성범 선생)
<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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