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제마다 어떤 특성이 있다. 단체나 사회,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위인은 그 사람만이 갖는 특성이 있고, 세계적 민족은 그 국가나 민족만이 갖는 어떤 특성이 있다.
그 민족 고유의 전통성이라든가 고유문화라는 것은 곧 그 민족 고유의 특성인 것이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그 고유의 특성이 너무 강하다 보면 독단에 떨어지거나 배타성을 갖기 쉽다.
우리 원불교의 경우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종교의 독단성과 배타성을 조화하기 위해서 포용과 수용의 문로를 넓혀왔다. 교리의 형성에 있어서 불교 유교 기독교 천주교적인 요소가 상당히 있고 기타 제도나 의식에 이르기까지 타종교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세계 종교 내지 미래종교를 지향하는 원불교로서는 매우 바람직한 포용의 자세라 하겠다. 그래서 원불교는 독단성이나 배타성보다는 포용성이나 수용성이 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용성이나 수용성의 면이 강하면 강한 만틈 원불교적 고유의 특성도 강해야 하는 것이다. 고유의 특성 없는 포용이나 수용은 자칫하면 모방성으로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원불교 교단의 모든 면을 살펴보면, 원불교 고유의 특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지나친 포용성으로 인한 모방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잇다.
처음 원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이 불교적인 것 또는 기독교적인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원불교적인 것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것이 원불교다.」「이것은 원불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하는 원불교 고유의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60여 년의 교단사 속에서 언제까지나 포용성과 수용성에만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다. 원불교 고유의 특성을 하나하나 찾아서 확립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본 경전인 정전이 소태산 대종사 당대에 이루어진 것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대종경의 경우 그 결집이 너무 조속하게 또는 간략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는가? 지금 낳은 사람들이 배경이나 상황 설명이 생략된 대종경의 설득력이 아쉬움을 말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상황 설명이 생생하게 나타난 대종경을 결집할 수는 과연 없는 것일까?
교서 결집을 위해서 특설 기관까지 설립하여 개교 50년대에 각종 교서의 결집을 끝낸 교단의 발전력을 우리는 높이 자부하고 싶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조금하게 서두른 느낌이 없지 않다. 짧은 시일에 교서 결집을 끝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으나 그러다가 보니까 역사성과 고유의 전통성의 결핍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가의 경우에 그 가사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곡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성가는 그 대부분이 기독교 작곡가 또는 비교도 작곡가에 의해 작곡된 것이다. 비교도나 기도교 작곡가에 의해 작곡된 성가가 원불교 교서라는 중요성까지 갖게 된 것을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교서로서의 원불교 성가는 원불교인에 의해 작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교 성가는 다시 작곡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포용성이 모방성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원불교적인 것, 원불교 고유의 특성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교서의 재결집을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하나 원불굦거인 특성을 확립하고, 교리, 의식, 제도, 용어에 이르기까지 비원불교적인 것은 하나하나 제거해가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유구하다. 너무 서두르는 것은 위험하다. 이제 하나하나 역사성과 전통성 위에서 「이것이야말로 원불교다.」하는 것을 확립할 때인 것이다.
그래야만 교당 건축 양식이나 교역자의 복장문제에 이르기까지 원불교적 특성이 살아날 것이다. 근래에까지도 지나치게 모방적인 즉흥행사가 교단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본다. 이야말로 교단의 발전인 것 같으나 사실은 교단의 큰 병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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