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은 다 우리에게 복과 죄를 줄 수 있는 부처님
행동 한 번 한 번을 불공하듯 한다면 복을 받을 수 있어
우주만물을 잘 사용하면 모두가 유익해

원불교 교리를 요약해서 네 가지 표어로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처처불상 사사불공」「무시선 무처선」「동정일여 영육쌍전」「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이다.
① 처처불상 사사불공
일원상은 진리를 형상으로 나타내어 말한 것이다. 일원상의 본질을 다시 찾아보면 곧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사은이요, 사은의 본질은 곧 우주만유이다.
사은이란 하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요소이다. 우리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늘과 땅이 없다면, 부모가 없다면, 나 이외의 사람이나 초목이나 짐승이 없다면, 국가의 법률이나 사회의 규범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다.
우리가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곧 이 사은의 은혜로 행복한 생활을 하려는 것이다. 등상불에게만 행복을 빌어서는 별 효과가 없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 다시 말하면 복을 줄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모두에게 복을 빌어야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세상 곳곳에 부처님이 있어서 죄복의 터전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행동 한 번, 일 한 가지마다 불공해서 복락을 가져오자는 것이다.
한없이 넓은 이 우주에 무수한 존재들이 있다. 우리 인간은 이 만물의 주인이다. 인간은 이 만물을 다스리고 생활에 활용한다.
그런데 만물은 서로 상생 아니면 상극의 기운으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서로 화합만 하지 않고 충돌도 하게 된다.
우리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것도 있다. 인간과 협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과 투쟁이 있다. 친구도 있고 적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밝은 지혜로 너른 안목에서 본다면 우주만물 하나하나 그 자체에는 조금도 해로움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잘 사용하면 모두가 다 유익한 것들이고 잘못 사용하면 해로움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서로 적이거나 원수가 아니다. 오직 서로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적이 생기는 것이지 잘만 대한다면 모두가 친구요 형제인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복도 줄 수 있고 죄도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이다. 그러한 부처님은 이 세상 어느 특수한 장소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만물이다. 복을 줄 수 있는 부처님이다. 즉 부처님은 이 세상 곳곳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데도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경하는 마음이 가득 찬 사람에게는 어디에나 부처님이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초기 돌 한 개까지라도 다 부처님의 위력을 가지고 이다.
가령 조그마한 연필 한 자루를 놓고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남의 연필 한 자루를 훔쳤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도둑질을 했다는 욕을 얻어먹게 되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사람을 속이고 욕심 내는 나쁜 마음이 싹 트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차츰 괴롭고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한 자루의 조그마한 연필을 부처님처럼 잘 공경하지 못했던 결과가 그처럼 엄청난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 한 포기의 꽃이 있다. 돌 틈에 짓 눌려서 제대로 잘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어린 학생이 그것을 보고는 돌을 옆으로 들어 내놓고 잘 자라도록 해주었다. 그 꽃은 잘 자라게 되고 그 어린 학생의 마음속에서는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착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마음이 더욱 성숙해서 그 어린 학생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남을 돕고 생명을 아끼며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꽃 한 포기를 사랑하던 그 마음이 마침내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천재와 백치가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말한다. 부처와 중생도 한 마음 달리 먹기에 달려있다.
순간순간의 무한한 연속이 영원이 된다. 복을 짓는다는 것도 굉장히 큰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그마한 일, 친절한 말 한 마디, 짐 하나 들어주는 것도 다 복이 되는 것이다.
불공을 하는 것도 많은 재물을 차려 놓거나, 천일기도, 백일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통하여 행동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
우리는 하루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나 물건을 대하게 된다. 또 많은 사건에 부딪치게 된다. 길을 가다가 잠깐 손수레를 밀어준 일이 하루 종일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하찮은 일로 친구와 몇 마디 말다툼한 것이 며칠간을 불쾌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순간적인 실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 거대한 우주가 보이지도 않는 무수한 미립자의 집합체이듯이 우리의 한 평생은 순간순간의 무한한 연속일 뿐이다. 이 세계는 그대로 거대한 하나의 부처님이요, 그 위에 생존하는 만물은 다 부처님의 손발이며 머리카락이요 숨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인간,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내 형제처럼 사랑하고 부처님처럼 공경해야 한다.
부처님은 특수한 장소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영원할 때는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불공도 특별한 사건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그대로가 다 불공이 된다.
우마가 밭에서 일을 할 때 괭이나 호미 한 자루가 다 부처님이다. 호미를 잘 사용해 풀을 잘 맨다면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으니 이는 곧 복을 받는 것이 된다.
음식 한 번 먹는 것이 보록 보잘 것 없는 일 같으나, 그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면 배탈이 나게 되니 이는 곧 벌을 받는 것이요, 잘 먹어서 몸이 건강해진다면 이는 곧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 만물은 다 우리에게 죄와 복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다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행동 한 번 한 번을 불공하듯이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복을 받아 잘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등상불을 찾아 불공을 하거나, 행동은 마음대로 하면서 복만을 빈다면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대를 우리의 가정으로 좁혀서 생각해보자.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어느 때 대종사님께서 봉래정사에 계실 때에 하루는 어떤 노인 부부가 지나다가 말하기를 집안 며느리가 성질이 사나워서 불효가 막심하므로 절을 찾아 부처님께 불공이나 올려볼까 하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어찌 등상불에게는 불공할 줄을 알면서 산부처에게는 불공할 줄을 모르는가?」 그 부모가 이상하게 생각되어 묻기를 「산부처가 어디에 계십니까?」 대종사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대들의 집에 있는 며느리가 곧 부처이니 그대들에게 효도하고 불효할 직접 권능이 그 사람에게 있는 까닭이라, 며느리에게 먼저 불공을 드려봄이 어떠하겠는가.」 그들이 다시 묻기를 「어떻게 불공을 드릴까요?」 대종사 대답하시기를 「그대들이 불공할 비용으로 며느리의 뜻에 맞는 물건도 사다주며 며느리를 오직 부처님 공경하듯 위해주어보라. 그리하며, 그대들의 정성을 따라 불공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몇 달 안에 효부가 되는 지라 그들이 다시 대종사께 와서 크게 고맙다고 하거늘, 대종사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곧 죄복을 직접 당처에 비는 실지 불공이니라.」고 말하였다. <대종경 교의품 15장>
결국 이 세상 모든 물건과 사람은 다 우리에게 복도 주고 죄도 줄 수 있는 부처님이니, 우리는 일마다 불공하듯 처리한다면 큰복을 받게 된다. 이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불공의 혁명적인 새로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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