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상의 첫 제자 팔산 김광선 대봉도
일장 통곡

밤새에 백설이 대지를 덮었다. 차가운 눈바람이 창문을 흔들어 대는 원기 24년 1월 3일 아침
「오늘 공부는 중지하시오. 영광에서 팔산이 열반했다는 전보가 왔소.」
대종사의 울먹이는 말씀에 선방은 슬픔의 바다로 변했다.
대종사께서는 알뜰한 첫 제자를, 우리 교단은 거룩하신 일등 창립주를 잃게 된 것이다.
대종사님 이하 총부 대중은 대각전에서 일장통곡, 망배식을 거행했다. 유허일 김형오 전음광 지환선 선생이 총부 대표로 떠났다. 영광지부를 향하여.
법좌에 오르신 대종사님
「팔산으로 말하면 이십여 성상에 고락을 같이 하였으므로 그 말할 수 없는 정의가 깊이 들었는지라 법신은 비록 생멸 성쇠가 없으나 색신은 이제 또 다시 만나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섭섭하지 아니하며 슬프지 아니하랴」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니, 일반 청중도 또한 비통함을 마지아니하였다. 대종사님 강연히 슬픔을 억제하시고 「팔산의 영혼을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 멸도에 대한 법설」을 설하였다.(「회보」52호, 「대종경」천도품 28장 참조)
거룩하신 공훈
선생은 우리의 선진이요 사표이시며 모범적 맏형이셨습니다. 대종사님을 친근하시기도 제일 먼저요 대종사님의 첫 제자이시며, 우리 회상을 창립하는데 여러 면으로 희생과 노력도 제일 먼저 제일 많이 하신 희유한 지보적 존재였습니다. 우리 교단에 공훈 높고 공심 많으신 맏형은 거룩하고 빛나며 향내 나는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공주)
선생은 대종사님의 무한한 뜨거운 눈물과 5천 교우의 지극한 애정을 자아내고 가셨으니 이로써 장부의 일생 능사를 마치셨다 할 것이며, 우리 교단은 이러한 선생님을 23년간이나 모셨던 것을 무한감사하고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동진화)
팔산 선생이 열반에 드시니 대종사님께서 눈물을 흘리시고 실성통곡하시기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과 팔산 사이에 맺힌 정곡과 팔산이 우리 회상에 어떠한 인물인가를 후래 사람으로도 능히 추상하리가 믿습니다.
(정산)
매사에 규칙을 엄수하신 일,
천신만고를 당하여도 불굴의 정신으로써 용진 하신 일,
정신 육신 물질의 삼공덕이 구비하신 일,
친히 노동을 즐기시고 임사에 호오를 가리지 않으신 일,
공부 사업에 솔선 하시사 실천궁행 하신 일,
의복 음식에 특히 검박을 주장하신 일,
열성과 신앙이 출중하사 만인의 사표가 되신 일 등 선생님의 공훈은 태산에 비할 바가 아니요 하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정일지)
「회보」52, 53호는 선생의 열반 추모 특집으로 꾸며졌다.
사제애의 극치
대종사님 보다 12세 연상으로 대종사님의 알뜰한 첫 제자가 된 선생은 찬탄했다.
「종문에 모신지 2십여 년에 대종사의 한 말씀 한 행동을 모두 우러러 흠모하여 본받아 행하고자 하되 그 만 분의 일도 아직 감히 능하지 못하거니와 그 가운데 가장 흠모하여 배우고자 하나 능하지 못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순일 무사하신 공심이요,
둘은 시종 일관하신 성의요.
셋은 청탁병용하시는 포용이라.
대저, 대종사의 운심처사 하시는 것을 뵈오면 일언일동이 순연히 공(公) 하나 뿐이요, 사(私)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아니하사 오직 이 회상을 창건하시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것이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사업하시는 것을 뵈오면 천품이 우월하시기도 하지마는 영광 길룡리에서 우리 9인을 지도하사 간석지를 개척하실 때에 보이시던 성의나 오랜 세월을 지낸 지금에 보이시는 지금의 성의가 전보다 감소됨이 없으시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대중 거느리시는 것을 뵈오면 미운 짓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무마하시고 애호하시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좋은 사람이야 누가 잘못 보느냐. 미운 사람을 잘 보는 것이 이른바 대자대비의 행이라」하시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라.
(「대종경」실시품 47장)
대종사님께선 알뜰한 혈심제자를 두셨다. 팔산 선생은 대종사님을 지성으로 뫼셨다. 우리는 이상에서 이심전심 심월상조의 극치를 본다.
교단이 드린 영예
원기 42년 4월 26일 대각개교 축하식에 이어 오후 1시에 영모전 광장에서 주산 구타원 팔산 팔타원 네 분에게 종사 대봉도 대호법 등의 법훈이 증여되었다. 네 분은 우리 교단 제일대에 빛을 남긴 창업원훈 동 식전에서 형산(팔산의 장남, 현 수위단원) 선생이 정산 종법사님으로부터 법훈장을 대수 하였다.
팔산 대봉도찬
일찍이 우리 회상 새벽 머리에 젊으신 대종사님 첫 제자 되어
남 먼저 일 하시고 혈인을 내신
거룩한 봉도정신 어이 잊으리
선생은 1879년 9월 6일에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탄생하시다.
어려서부터 근실 강직하시더니 일찍이 대종사님 성도 당시에 그 뒷받침을 하셨고 회상을 열으실 제 남 먼저 첫 제자가 되시다.
원기 8년 40세 되시던 해에 9인 제자와 더불어 백지에 혈인을 내시고 영산 방언의 고역을 비롯하여 총부 창설 당시 엿장수를 하시는 등 가지가지 일에 피 어린 정성과 힘을 다 하시다.
원기 12년 총부 서무부장, 14년 총부 교감, 15년 진안 마령지부 교무, 16년 영산지부 서무부장, 17년 마령지부 교무, 20년 김제 원평지부 교무, 원기 22년 총부 순교무를 역임하시다가 24년 1월 3일 61세로 거연히 열반에 드시다.
선생은 위로 대종사님을 받들매 12년 위인 선생이시었건만 법자로서 받드시었고 법을 두호하매 제일 어렵고 고된 일을 자진하여 담당하시었으니 언제나 창립의 원훈이 되셨고 공도자의 사표가 되셨다.
선생이 입적하시매 대종사 친히 선생의 일생 공덕을 전형하시니 준특등의 영예와 더불어 대봉도의 최고위를 차지하시다. (「원광」19)
「대봉도」는 우리 교단이 선생에게 드린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
의형제
소년 대종사는 12년 위인 선생을 「형」이라 불렀다. 두 분은 의형제를 맺었다. 아람드리 소나무 참나무 잡목들이 울울창창한 마을엔 대낮에도 늑대가 나오고 호랑이가 흙자갈을 뿌렸다.
유난히 희고 고운 살결에 맑은 빛나는 눈을 가진 소년 대종사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선생은 가슴이 아팠다. 선생은 대종사님을 격려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종사의 뜻을 짐작하고 어떤 밝은 예감이 들었던가.
선생의 장남인 형산은 대종사의 무릎에서 자랐다.
노루목 숲에 있는 초가지붕에 꼴이 지고 잡풀이 자랐다. 지붕에서 새어드는 빗물이 입정에 드신 대종사의 무릎을 적셨다.
애견 호랑이
선생은 어려서 숙부 (김용칠)에게 출계하여 양모 조연풍씨의 극진한 애정 속에 자랐다. 선생은 한학을 배웠다.
17세 때에는 길룡리 마촌 산중에서 1년간 음양복술을 공부했다. 잡목으로 움막을 만들고 주문을 외웠다. 이때마다 큰 호랑이가 문을 지켰는데, 그 호랑이는 집에서 키우는 애견처럼 선생과 친근하게 되었다.
첫 제자가 된 의형
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
원기 1년(1916년) 3월 26일, 노루목 숲에서 20세기의 신화가 일어났다. 「폐인」으로 알려진 26세의 젊은 대종사께서 대원정각을 이루신 것이다.
선생은 마음 깊이 감동, 환희 용약하였다. 아우가 스승이 되고 형이 첫 제자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의형제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때 선생은 38세의 장년이었다.
선생은 정법을 배우기로 맹서한 후, 여러 마을 사람으로부터 받을 삼천여 원의 채권증서를 불살라버렸다. 통쾌한 일이다.
세 거인
원기 1년 선생의 안내로 27세의 건강한 청년이 범현동에 와서 대종사를 뵙고 장시간을 상담하고 제자가 되었다. 이 분이 삼산 김기천 선생이다.
대종사 팔산 삼산 세 거인(1미터 82센티를 넘는)의 대화장면을 그려보자. 삼산은 대종사님으로부터 견성 인가를 받으신(「대종경」성리품 22장) 우리 교단 창립의 초석이다.
땀방울이 송알송알
박학이 때론 도를 방해하는 핸디캡이 되기도 하는가. 선생은 항상 마음 가운데 가셔지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대종사 비록 스스로 대원정각을 이루셨으나 글을 배우지 아니하셨다. 대종사는 무식하시다. 나는 한학에 통달한 선비다」고.
젊은 대종사 이를 모르실 리 만무다. 어느 날 선생을 부르시어 먹을 갈고 붓을 잡게 했다. 대종사 한시(漢詩)를 부르신다. 선생의 붓 끝이 바빴다. 붓이 머뭇거리자 「선비가 그 글자를 몰라. ××변에 ××자를. 」하시며 한시 삼백여 수를 읊으신다. 선생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다시 깜짝 놀라
「법의대전」은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때때로 읊으신 가사와 한시를 모은 책이다. 이 책을 불살라 버리라 명하셨다.
선생이 이 책을 불사르다가 마음에 드는 글 몇 편을 바위 밑에 감추고 왔다. 대종사 부드러우나 엄하게 「남겨둔 글마저 소각」시키라 하신다.
선생은 다시 깜짝 놀랐다. 이후부터 자녀가 부모님을 대하듯이 섬겼다. 대종사의 거실 도구까지 소중히 여기시며, 21년이나 어린 정산을 교단의 중앙으로 법형으로 상대하였다.
영산방언 일화
대종사는 의외의 일을 시작하셨다. 대종사의 임야 토지 가산집물을 처리하셨다. 저축조합 숯장사로 자금을 만드셨다.
원기 3년 3월 구인선진님께서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려 할 때, 마을 사람들은 조소했다. 젊은 대종사 친히 일을 감독하셨다. 선생은 만인의 비난과 조소를 일축하고 많은 재산을 희사했다. 우리의 여덟 선진님께서 몸소 흙짐을 지셨다. 등이 벗어지고 손발이 텄다. 형산 선생은 이때 16세의 소년으로 일했다.
이해 7월 정읍 화해리로부터 얼굴이 달덩이 같이 밝고 고운 18세의 소년이 왔다. 소년은 밥 짓는 일을 하였는데 쌀을 씻을 때면 서투른 솜씨라 상체를 흔들면서 조리질을 했다. 이 분이 뒷날 대종사의 종통을 이은 정산 종법사시다.
선생은 둑이 무너지는 것을 발견하자 몸으로 물을 막았다.
아홉 선진님은 밤이면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에 모여 앉아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대종사의 법설에 심취했다.
이 제1차 방언공사가 끝난 36년 뒤인 원기 41년(1956)에 제2차 방언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총재 정산종법사, 위원장 송혜환, 형산 선생은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수문을 만들 때 두 대의 발동기로 24시간을 물을 퍼내는데 선생은 밤을 새워야했다. 겨울의 바닷바람에 다리가 굳어버린다. 귀가 얼고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
팔산 선생은 제1차 방언공사에 가산을 희사하며 흙짐을 졌다. 장남인 형산 선생은 그 후 제2차 방언공사 총감독을 하며 밤을 새웠다. 방언공사를 하기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나온 아버지와 아들인가!
수박장사
선생은 신성이 장하시고 과단성도 무서우며 공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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