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가족의 정의를 건네자-

10월 5일(음력으로 팔월 보름)은 추석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추석은 우리나라 전래의 고유한 민속 명절로서, 저 옛 신라(유리왕 대 가배 행사) 이후로 천재(千載)의 세월을 넘어 서서 오늘날까지도 백의 겨레의 맥박과 숨결 속에서 잊혀지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옥, 또 이어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추석이라는 명절은 물론 거국적인 기념일도 아니요 또 그 무슨 거창한 축제일도 아니지만, 이 나라 백성이 아니면 맛보지 못하는 온갖 소박한 정취와 생활의 애환이 서린 백성의 명절, 가정의 명절, 평화의 명절이라는 데 추석이 지니는 특징이 있다 하겠다. 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상화에 있어서도 우리 겨레가 유달리 명절이라는 관념 같은 것을 못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만 연례행사이니까 마지 못한다는 식의 굳어진 습속에서이기도 하겠으나, 보다는 근원적으로 우리 겨레 개개인이 지난 착한 인정, 아름다운 생활 감정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리라.
비롯 농경을 생업으로 삼던 시대와는 우리네의 의식구조나 생활환경이야 실로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이미 본디의 뿌리가 돼버린 그 착한 마음씨와 그 아름다운 슬기, 전통의 멋만은 그 누가가 뭐라 해도 변질될 수 없는 것이다.
저마다 격벽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누려야 하는 복잡한 삶이면서도 변할 수 없는 것,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현대의 구조적 기능이 고도의 과학 기술, 고도의 생산능률을 요청하는 것이라지만 겨우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며, 과거를 열어 미래를 꿰뚫어 나가는(계왕개래(啓往開來)) 보다 차원 높은 성숙한 현대, 총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 현대라면 그것들을 이끌어 나가는 도도한 정신적 자세와 당당한 문화적 방향이 항상 선행하여 빛이 되어 주고 길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현대 문명의 산물인 고도의 과학 기술과 고도의 생산능률은 이른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부익부 빈익빈 등 양극화를 불러오는 세력으로서의 역기능을 담당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가 한 울안이 되고 인류가 한 권속이 되며 이 세상이 한 일터가 되는 인간 가족 공동체의 문화를 이루어나가는 정신개벽의 진리적 역사적 기능으로서의 봉공자이어야 한다. 요즈음의 의미와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대의 추석은 한국의 국토에 사는 인간 가족의 조용하고 조촐한 명절인 것이다. 이 날을 기하여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 노유 빈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가정을 찾고 고향을 찾아 조상의 무덤에 성묘하고 가족 친지를 만나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의 애환과 향수를 서로 느끼면서 모처럼의 흐뭇하고 한가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의 이웃과 주변 상황은 이 추석을 맞아 너무나도 허전한 마음이 공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족의 따뜻한 인연이 끊인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무자력한 어린이와 노인들, 막벌이 노동으로 허덕이며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가는 저층의 근로자들, 지난번의 태풍으로 불시에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농토를 잃고 실의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수많은 이재민들, 또 그 밖에도 불우한 이웃들- 이들은 실로 그 어느 명절인들 챙길 겨를도 없이 평일의 한 때를 지탱해나가기에도 고달프고 힘겨운 애로와 난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 추석 명절을 계기로 가령, 다만 한 때라도 좋으니 불우한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진정으로 그들이 당면한 역경과 고난을 서로가 함께 하는 「인간 가족 공동체」로서의 정의와 사랑의 손길을 건네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에너지 쇼크와 물가고라는 바라직하지 못한 가운데 맞는 올해의 추석, 그러나 저 나름대로는 고향을 찾은 한 가족끼리 모여 앉아, 햅쌀과 빚은 송편과 햇과일을 들면서 한가위 가을 맑은 밤의 보름달을 바라보는 그 오붓하기만 한 정경, 진정 이들의 그 한 마음에야 그 무슨 티끌이 묻고 그 무슨 이질감인들 끼이겠는가마는 저 허공에 둥두렷이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는 소박한 인연으로 늘 인간 가족으로 연해야 하는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속에도 부디 저 한가위 보름달의 두렷이 밝은 체성을 회복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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