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교적인 유족 돕기 운동 절실
외로운 선진 유족들 뜻밖의 방문에 반가워하고
선진이 남긴 말씀을 가훈 삼아

정산종사께서 어느 경절을 맞이하실 때마다 제자들이 하례를 챙기려 할 제 『내 일찍이 대종사님을 뫼실 때 한 번도 그 도리를 다하지 못했거늘 어찌 나로서 그러한 하례를 받으리요.』하시고 거처하시는 조실이나 입으시는 의복이나 식사에 이르기까지 검박하시며 도리를 선진들께 못다 하신 도리를 안타까워하시던 그 성자(聖姿)가 되새겨진다.
한 가정이나 단체의 무궁한 발전은 추원보본의 면밀한 정성이 유구하여질 때 이룩된다고 한다면 우리 또한 대종사님을 비롯하여 구인선배님과 역대 선진님들의 유덕을 길이 사모하고 받들어 끼치신 대업을 더욱 들이 내는데 교단의 생명이 있고 무궁한 미래가 약속되지 않을까 한다.
매년 맞이하는 6·1 대재이지만 반백주년 기념대회를 앞두고 성대한 행사를 준비하기에 이르르니 오히려 대종사님을 비롯하여 선진님들의 단성(丹誠)으로 이루어 끼쳐주신 이 교단이라고 생각되어질 때 새삼 천만천회가 되살아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함에 아직 무엇으로써 그 유덕을 흠모하는 표시가 있었던가! 머리 숙여 죄송하기 짝이 없다.
우선 구인선배님의 유족을 찾아보기로 하자. 열반에 드신지 혹은 40년 30년 20년 10년이 되었으나 산재해 있는 묘소나 생계를 위하여 동남북에 흩어져 계시는 그의 유족님을 생각할수록 도리에 소홀하였고 정의(情誼) 결여되었음을 머리 숙여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에 적은 정성이나마 이번 6·1 대재를 마치고 영광에 계신 구인선배님의 묘소 참배와 유족 심방을 결의하고 충분한 자료나 준비도 없이 그저 찾아 뵙는 것만으로 올해의 주어진 과제로 알고 영산 출장소장 낭산 선생님을 뫼시고 심방 길에 올랐다.
먼저 일산 선생의 유적이신 친자 이명진씨(61세). 이 어른은 유일한 일산 선생님의 혈육이시오, 현 초량교무 이정무 선생의 부친이시다. 영산으로부터 20미터 지점에 있는 일산 선생님의 묘소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과수원을 경영하시며 6남 4녀를 거느리시고 조용히 다복하게 가계를 이어 자녀들의 성장을 지켜보시며 노년을 즐기시는 회갑을 맞이하신 노장이시다.
뜻밖의 심방에도 오히려 반겨하시며 숙겁 동지와도 같이 다정스러이 맞아주신다.
『아버님의 출가로 인하여 후생들의 고생에 대해여 어떠한 감상이라도……』하고 묻는 말에 오히려 담박하게 생전의 교훈을 되새겨 주신다.
방언공사를 비롯하여 공사에 분망하신 가운데 집에 들리시면 언제나 가족을 모으시고 『너희들은 원불교를 떠나거나 신심이 물러나면 그 때는 죽을 것이요. 만일에 죄를 지으면 원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그 죄과가 몇 십 배 될 터이니 명심하라』하신 교훈은 지금도 가훈처럼 받들고 있다고 한다.
『잊혀지지 않으신 일 가운데 어떤 일이 있을까요』라고 묻는 말에 열반을 하루 앞두시고 당시 영산에 계시던 성산 선생을 부르시어 가족들과 함께 입으시던 의복과 소지품 등을 일일이 가르시게 하고 공중에게 받으셨던 모든 물건은 남김없이 교중에 바치게 하시고 공사 간에 미진한 일들을 빠짐없이 부촉하시고 열반에 드신 것을 뵙고 장하시고 거룩하신 성자임을 깨닫고, 못다 받들고 못다 뫼신 한이 뼈아프게 느껴진다면서 목매어 하신다.
특히 구인 선배님 가운데도 정산법사님은 반년 동안 집에서 시봉하였기에 정이 깊어 잊혀지지 않는다고 부언하신다. 촉박한 시간 때문에 더 말씀을 못 듣고 묘소를 참배하고 아쉬운 정을 뒤로하고 총부에서 보내주신 금일봉을 전달하고 다음 길을 재촉했다.
회로에 들린 백수지부 앞에 살고 계신 이산 선생님의 혈육이신 둘째 따님 이진찬 여사(57)를 찾았다. 이산 선생님은 1남 2녀를 두셨으나 한 분의 아드님이 불행히 요절하여 조카로 하여금 양자하여 가계를 이어가게 하였으나 현 백수면 천정리에 이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2녀 중 한 분은 묘량면 덕흥리에 살고 있고 그 한 분인 이 여사가 이곳에 살고 계신다고 한다.
마침 이 여사는 안 계시고 부군이신 배영록(64세)씨를 뵙고 심방한 뜻을 전하니 뜻밖의 일에 의아해하며 감사해 했다. 빙부이신 이산 선생님을 회상하시며 잊혀지지 않는 일이라도 하고 묻는 말에 『언제나 원불교에 잘 나가라』부촉하시던 말씀과 평소의 솔성이 정직하시어 중인으로부터 존경받으시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가정형편은 농촌 살림으로 중류 정도로 3남 2녀를 두신 다복하신 편이시다. 1시간 이상을 기다렸으나 끝내 따님이신 이 여사를 못 뵈온 채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묘소는 영산 구호동에 뫼셨다고 한다.
영산으로 돌아와 삼산 선생님의 따님이신 김양화 여사(53세)를 찾았다. 바로 영산지부 옆에서 그의 친자 정귀원군(원대 교학과 재학 중)이 외조부이신 삼산 선생님의 후계를 이어 전무출신을 뜻한 것을 유일의 낙으로 삼아 간고한 생활에도 오히려 법열에 잠겨 낙도생활을 하고 계신다.
삼산 선생님은 생전에 아드님을 두시지 못한 채 가계를 가까운 친족에게 입양하였으나 조사하셨고 그의 아들이(성명 미상) 가계를 잇고 있다 한다. 두 따님 중 한 분의 거소 알 길이 없고 단 한 분의 김 여사는 처음 전무출신을 지망하기도 하였으나 사정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 유일한 아드님인 정귀원 군으로 하여금 전무출신 하여 당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리라고 한다. 아버님 삼산 선생님에 대한 회상을 묻자, 10세 때에 열반하셨고 그 이전에 공중에 계셨기에 뵈올 기회가 드물었고 뫼시지 못함을 한스러워 할뿐이다.
묘소를 출생지인 천정리에 뫼셨다고 한다. 가정이나 가족들을 못 돌아보신 채 공사에 오롯하셨던 선진님들의 장하심과 그로 인해 후예들의 낙후되어 있는 정상을 살필 때 한편으로 옷깃이 여며지면서,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게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교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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