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부
육산님 유족은 6·25 때 참변 당해
유족했던 생활· 전무출신으로 가산 기울어… 사산
어려운 살림에 금일봉 전달하고

아직도 해는 남았지만, 바쁜 일정이기에 걸음을 재촉하여 사산 선생님의 유족을 탐방하기로 했다.
당대의 사산님께서는 중류이상의 유족한 생활환경 속에서 초창에 전무출신 하신 뒤 가정을 불고하셨기에 점차 가산은 기울어지고 자녀들도 뜻대로 교육도 시키지 못했다.
2남 1녀를 두셨으나, 장남은 6·25 전란에 참변을 당하시었고 차남은 전무출신까지 하였다가 가사에 임하였던 중 일정 치하에서 요절을 당하시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손 사형제가 있어 각기 분산되어 있으나 장손 성직이 전무출신 하였다가 휴무하고 현 동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차손 성해는 길용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따님인 용봉 여사는 전무출신 하였다가 제가하여 영산지부의 주무로 일하고 있다 한다.
그리하여 차손 성해가를 탐방하여 뜻을 전하고 준비해 온 금일봉을 전달하여 어려운 살림을 위로할 뿐 그 조부이셨던 사산 선생님에 대한 회상 같은 건 전혀 알 길이 없다.
묘소는 구수리 사자암에 뫼셨다고 하여 멀리 망배하고 생전에 사산님을 추모하며 가슴 뭉클함을 억제할 길 없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석양을 등지고 마지막 오산 선생님의 유족을 심방했다.
오산 선생님은 가장 먼저 열반하시어 기억에 까마득하신 어른이나 초창의 신심과 심법을 사정하시와 대종사님의 특명으로 최초로 법강항마위에 추존하신 성자이시다.
유족은 한결 같이 선생이 계셨던 그 집에 세거(世居)하고 계신다 한다. 한 분의 아드님이신 박계축(53세)의 장남 주선이 전무출신 하였다가 휴무하고 가사정리를 위하여 고향에서 국민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차남은 광주 모 회사에 근무 중이라고 한다. 당대에는 오히려 간고했던 살림이 아드님인 박계축씨의 성실하고 근면함을 토대로 자녀들을 교육시켜 이젠 가산의 기초가 세워져서 중류생활은 하고 계신다.
역시 14세시에 선고이신 오산 선생님의 열반을 당하셨기에 추모되는 일은 없고 이젠 다못 한 번이라도 뫼셔 보지 못한 자녀의 도리로써 유감됨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교단에 향한 향의는 고마우리만치 장한 바가 있고 머지 않아서 장남의 새 출가를 다짐하는 교단의 주초다움을 잊지 않으신다.
묘소는 대종사 구도의 터이신 삼밭재에 뫼셨다 한다. 다못 어둠이 깃들기 시작함을 안타까이 생각하며 멀리 망배하고 영산에 돌아왔다.
여기 또 가슴 아픈 일은 육산 선생님의 유족은 찾을 길이 없다. 6·25 전란 시 전 가족이 참변을 당하였고 오직 따님인 박일춘 여사가 이리에 이거하여 외손인 이증원군이 전무출신 하여 보화당에 근무하고 있어 그의 심방은 뒤로 미루고 맡겨진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다못 이번 길에 흡족한 심방과 보본의 성의에는 미흡한 바 있으나 이만큼이라도 9인 선배님의 유족을 찾아 형편을 살피고 유족들에게 그 뜻만이라도 전한 것으로써 다행히 여기며 앞으로 선진대우와 근본의 문제점만을 몇 가지 찾은 것으로 여길 뿐이다.
돌이켜 생각건대, 한 평생 다 바쳐 이 공부 이 사업에 봉공하였을 때 그 유가족의 낙후상은 당연의 이(理)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정상이라면 오히려 치부하고 유족 하였다면 그는 비정상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교단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점은 봉공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봉공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진 제도적 보완이 지극히 필요한 것이 아닌가? 초창기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만 자위하고 체념시킬 일만은 아닌 상 싶다. 그리고 교단의 형편이 풀려지는 대로 후진을 위해서라도 선진들의 유족에 대한 응분의 성의와 뒷받침이 있음직하다 하겠다.
우리 모두 미루지 말고 9인 선진님들을 비롯하여 열반에 드신 여러분 선진님들의 유족 찾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다짐하자고 제언한다.
총부 뿐 아니라 지방도 마찬가지다. 지방 창립을 위하여 정신 육신 물질을 다 바친 창립 유공인들과 그 유족들에 대한 근본의 정신을 부흥시켜야 할 것을 이번 길에 더욱 절감하면서 오히려 죄송함을 사과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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