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전음광 선생 ③
원기 20년대에 활약한 총명과 달변
많은 사회· 문화· 교단 문제 파헤쳐
우리의 2세는 우리의 학교에서 가르치고 티없는 정금미옥의 인물 만들자.

진실한 선도자
선생은 「월말통신」27호에 울먹이며 「회보」의 붓을 들었다. 원기 15년 5월 6일 현총부 건설에 산파역을 담당, 초대불법연구회장을 역임한 추산 서중안 선생이 49세로 병사한 것이다. 「월말통신」27호는 서중안 선생의 열반특집으로 꾸며졌다.
전음광 선생은 회설에서 서중안 선생을 「영민한 안목을 가진 본 교단의 진실한 선도자 특수한 창건자」라고 평하고 있다.
서중안 선생은 원기 8년 7월 성덕면장으로 있을 때 형 서동풍의 연원으로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세를 관측하고 계신 대종사를 뵙고 구세의 대성임을 간파, 사제의 의를 맺었다. 다음날 아침엔 부자의 의를 맺었다.
이어 『대종사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는 만큼 인류의 불행은 커가고 있으니 하루 속히 하산하여 교화의 성은을 베풀어주셔야 하겠습니다.』고 간청, 현 총부 건설에 산파역을 담당, 초대 불법연구회장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회칙개정에 제하여
원기 18년에 교단의 기강인 회칙을 개정 인쇄에 붙이게 되었다. 이에 전음광 선생은 「회보」 8호 「회설」에 회규 개정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물론 이 규약은 그 형세의 변동을 따라서 자주 개정될 것은 제언을 불필요할 바이나 본회의 현황과 장래 발전에 있어서 금번 개정된 신규약이 가급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규를 우리 각자가 실행치 않는다면 회규가 본회 발전에 별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은 정칙이라. 차체에 각 처에 산재한 회원제위나 간부 일동은 호상심력 단합하여 규약을 탈선치 아니하며 개정된 신약이 본연의 사업발전상 무쌍한 실효가 있도록 하기 바란다.』고 설득하고 있다.
선생은 육법전서를 외우는 총명과 명쾌한 달변으로 「변호사」란 별명을 얻었다. 선생의 장남 팔로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차남이 현직 검사로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공익기관의 창립을 두고
현대사회는 실질적으로 공익을 주는 종교인, 공익사업을 전개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다. 본 교단은 교화 교육 자선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선생은 「공익기관의 창립을 두고」라는 「월말통신」 21호 회설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한 사람이 바다로 흐르는 모래를 모아 섬을 만들어 살 곳을 찾지 못하여 헤매는 인간들을 살게 하고 뭇사람이 버린 종이조각을 모아 다시 종이를 만들고 그 돈으로 이 사회에 공익사업을 이루었다면 칭송하여 마지아니하리라.』
선생의 글엔 무리가 없다. 비약이 없다. 선생의 논리는 대종사의 정신과 교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생의 「비전」은 실현가능한 설계다. 선생은 「완고한 구식을 타파한 이상의 새 마을」을 구상하고 있다.
『유아양생소를 설치하여 전무출신 자녀를 양육한다면 그 부모는 가정의 구애, 자녀의 구애를 벗어나 육신과 정신을 오로지 이 사업에 바쳐 일할 수 있을 것이며,
유치원을 설립하여 천진난만히 양생소에 길러낸 2세들을 정법 하에 습관을 들인다면 장차 얼마나 광명정대한 요표(要表)를 품게 되며,
학교를 설리하여 유치원 교육을 받은 그들을 우리 학교 우리 법하에 가르쳐 위대한 인격을 이룬다면 청산 속에서 파내온 한 덩이 옥돌을 정으로 쪼고 갈아 조그마한 티가 없는 순실무이한 정금미옥의 인물이리라.
이 사람으로써 우리의 사업과 공부계를 맡긴다면 우리 회에 얼마만한 경사이며 전 세계에 얼마만한 공헌이 되랴!
양로원을 건설하여 젊어서 본회 사업에 노력하던 그 인물들을 안한히 뫼시면 이것이 후진의 도리가 아니며 출생 이후 죽도록까지 오로지 행복을 주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랴!』
선생은 이렇게 내일의 본교 교역자상을 교역자의 일생을 그려보고 있다.
『병원을 설립하여 빈곤 질병자를 구제하며, 사농공상의 기관을 세워 길거리에 두류하는 동포들의 정신과 생활의 길을 개척하여 주면 어찌 세계적으로 모범될 바가 아니랴!
동지들이여,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우리는 이러한 좋은 포부를 실천하여 우리의 지위를 높이도록 노력하라. 시일이 천단함도 불구하고 공익 총액이 4백 원에 달하였으며 회원이 60여 인이니 더 한층 동심동력 매진하라. 오늘의 부스러기 돈이 이 세상을 놀라게 할 지 세상사 뉘 알랴』
이상에서 말한 탁아소(유아 양생소)는 세대 전무출신 제도와 직결되는 것으로 아직 숙제로 남아있다.
보은행으로서의 공익정신은 끊임없이 계몽되고 고취되고 보급되어야 하겠다.
남자 교역자 문제
대종사= 『전무출신이 사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공사에만 전력하게 하기 위하여 곤궁한 사가는 교단에서 보조하는 제도를 두면 어떠하겠는가.』
전음광= 『앞으로 반드시 그러한 제도가 서야 될 줄 아나이다.』
중략
대종사= 『…… 앞으로 차차 그러한 제도를 세워서 활용해보되, 교중의 형편이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하는 때에는 기관을 적게 벌여서라도 현직에 있는 전무출신으로서 사가 일에 마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대종경」교단품 15장)
이 때 제기된 남자교역자 문제는 아직도 고려되고 제도화되고 각성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현대문명과 미래도덕
선생은 「월보」36호 회설 「현대 문명과 미래 도덕」에서
『동방의 일부에 깊이 잠들었던 아세아는 급격히 밀려오는 서구 풍조의 세례를 받아 모든 것이 점점 혁신되어 나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 『너무 서양풍조에 끌리지 말고 마취 당하지 말라. 그리고 각성하여 동양을 비관치 말라.』면서
『우리는 정의도덕으로 미래세계의 요구에 대답하려하나니 「물질이 개벽되지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의 정신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대세를 달관하여 동양도덕의 주인이 되며 정신문명의 표본이 되며 세계평화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5막 2장
선생은 「정신과 육신을 정의에 질박아 훈련받은 인생으로써 활동하라」「입선의 필요에 대하여」「삼강령에 대하여」「도덕과 도인」「과학과 도학」「수도자의 생활」 등 많은 글을 남기고 있다.
주산 의산과 함께 본교 3총사로 활약하던 선생은 대종사 열반하던 원기 28년 37세 때 교역자의 옷을 벗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선생의 교역자 생활이 5막 2장으로 중단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생은 원기 44년 7월 21일 신용리 자택에서 52세로 열반. 유족으로는 권동화 여사(68)와 장남 팔로, 차남 팔현(목포지청 검사), 장녀 팔근, 그리고 차녀 팔진은 로스안젤레스에 있다.
<다음은 주산 송도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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