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백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

반백년 기념대회를 성대하게 끝맺게 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감격과 회포에 젖어 들게 한다. 뇌뢰산중 험난한 골짜기에서 기어 올라온 등산객이 안개가 확 트이는 산정을 정복했을 때 맛보는 것과 같은 상쾌감이 우리의 가슴속을 후련하게 해 준다.
1대 36년의 성업 봉찬에 이어 두 번째로 성업봉찬 사업을 벌여왔던 우리는 7년이라는 세월을 가장 유효하게 활용했고 60만의 뜨거운 정성이 가장 알차게 동원된 가운데 유종의 미를 거두면서 원만한 대회를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분석 검토할 점이 있지 않으나 이는 차후로 미루고 우선 그간의 당무자들과 전 교도의 노고에 대하여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한 짐을 덜어다는 안도감이나 해방감보다는 우리 교단의 새로운 앞날이 이제부터 전개된다고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이라고 하는 시대상이 우리 교단의 안일한 동면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센 파도에 시달려야 하는 고해중생의 신음이 보다 더 절실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우리 교단의 걸어온 발자취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걸음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민족의 저변에 파고 들어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고 정신을 지도해 온 것이었다.
단순히 우리의 교리를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여명기에 개척자적 입장에서 정신의 방향과 생활 양식의 정립을 명시해주는 지도역량을 발휘했던 것이다.
전남 영광의 일우에서 중생제도의 법등을 높이 들었던 서기 1916년, 그 후 3년이 지나서 3· 1 운동이 일어나자 일경은 끈질긴 박해와 감시를 우리 교단에 집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그 속에서도 진리신앙의 기치 아래 우리 민족의 뇌리 깊숙이 박혀있던 미신을 뿌리 뽑기에 온갖 정력을 다 기울였으며 공부와 사업의 병진을 강조하여 영육의 쌍전을 기함으로써 종교 활동에서 오는 현실사회에서의 이탈을 방지하는 한편 전통적으로 근로를 경시하던 고루한 양반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국민 개로(皆勞)의 정신을 고취하여 국민경제의 성장에도 공헌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번거롭기 짝이 없던 제반 예씩과 풍습을 간소화하도록 혁신하였으니 이로써 분망하기 그지없는 현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국민 생활양식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근래에 강조되기 시작한 가정의례준칙에 앞서서 반백년 전의 일로써 앞날의 세계를 통찰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명시하여 주신 대종사님의 대지도력을 흠모하는 정이 새삼 간절해진다.
이렇듯 본교는 하나이 종교단체로써 영적 구제만을 목표로 반ㅂ개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에게 작용하여 바람직한 사회건설에 매진하고 민족의 번영과 결속을 이하여 공헌한 바가 지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우리 교역자들은 모든 사심에서 완전히 떠나서 오직 공도에 헌신해 왔고 이를 뒷받침 하는 권장부들은 온갖 생활고를 참아가면서 출가한 교역자로 하여금 후고(後顧)의 염려를 갖지 않도록 내조의 정성을 다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저력이 되어 해방 직후 귀환동포구호사업에 봉사하면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고 교육 자선의 모든 사업이 차질 없이 혁혁한 성과를 거두어 온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작고한 저명한 모 정치인이 『우리나라의 모든 공무원들이 모두 원불교 전무출신자와 같은 정신을 가졌다면…』하고 아쉬워했던 말은 우리 교단이 오늘을 갖게 된 원인 중의 한 핵심을 들여다 본 발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반백년 기념대회가 막을 내렸다. 산뜻하게 단장한 큼직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영산성지가 장엄되고 서울의 기념과도 건설 중이다.
그러나 우리 교단의 힘은 아니 생명은 대종사님의 정법과 신봉하는 60만 교도의 정성과 1천명 교역자의 순일한 헌신인 것이니 이로써 우리 교단의 비약은 멈추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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