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종교로 들어가는 첫 관문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다.

우리가 삼학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있다. 수영을 하러 바다에 들어갈 때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그냥 뛰어들면 위험하다. 군인이 싸움터에 나가서 정신 자세가 흐릿하다면 잘 싸울 수 없다.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면 무슨 일을 잘 하기가 어렵다.
삼학공부란 곧 부처되는 공부이기 때문에 돈을 벌거나 벼슬을 하거나 박사학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삼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팔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학팔조를 촉진시키는 신분의성과 방해하는 불신 탐욕 나 우를 팔조라고 하는데, 촉진시키는 네 가지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것이요, 방해하는 네 가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버려야만 할 것이다.
대종경 신성품 3장에 보면, 한 제가가 대종사께 여쭙기를 『저는 본래 재질이 둔하온데 겸하여 공부하온 시일이 아직 짧아서 성취의 기한이 아득한 것 같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의 공부는 원래 재질이 있거나 없거나 시일이 짧거나 오래되었거나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정진하고 못하는 데에 큰 관계가 있다. 누구나 신· 분· 의· 성만 지극하면 공부의 성취는 날을 기약하고 가히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가 되는 공부는 재주나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에 문벌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신· 분· 의· 성으로써 크게 정진하는 데 있는 것이다.
① 신(信)
믿음은 무슨 일을 할 때에 마음을 결정하는 원동력이 된다. 종교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 믿음이라 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종교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현의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조그마한 일 하나라도 할 수가 없다. 가족을 못 믿으면 가정생활을 할 수가 없고, 운전사를 못 믿으면 자동차를 탈 수도 없다.
삼학을 공부하여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란 매우 이기적인 것이어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부처님을 찾다가도, 좋은 환경이 되면 잊어버리기를 잘 한다. 성경에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대종사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어떠한 경계에 부처될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혹 하늘을 뚫는 신심이 나는 듯 하다가도 시일이 좀 오래되면 그 신심이 까라지는 수가 있으며, 또는 없던 권리가 있어진다든지, 불화하던 가정이 화락하게 되었다든지 할 때에는 신심이 변하기 쉽다.』
<대종경 신성품 4장>
불행한 경우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한 경우에는 그 행복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꾸준한 신심이 필요하다. 만약 행복해졌다고 신심을 놓아버린다면 곧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대종경 신성품 7장을 보면 『믿음은 곧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된다. 믿음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하는 것과 같다.』하였다.
지식을 많이 가진 어진 어떤 학자가 오랫동안 수도를 한 스님을 찾아갔다.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학자를 맞이한 스님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잔에 가득 찼는데도 자꾸 따르고 있어 잔은 넘쳐흘렀다. 이를 본 학자가 『스님, 잔이 넘치는군요.』 스님의 대답인 즉 『가득 찬 잔에는 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보잘 것 없는 지식은 다 비워버려야지 그렇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에 『믿음은 도를 깨치는 근원이요, 공덕심을 쌓아가는 어머니가 되며, 일체의 선업을 짓게 된다.』하였다.
믿음이 이와 같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잘못 믿거나 치우치게 믿는다면 오히려 파멸을 가져온다.
미신도 믿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바른 믿음이 못되었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케 하고 개인을 파멸시킨다. 미신은 패가망신이 독소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정당한 진리 즉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요 부처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이다. 미신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믿음을 가질 때 부처가 될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② 분(忿)
분이라 하는 것은 용맹 있게 정진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이루어야 할 때에 권장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기 힘든 일이라도, 몇 번 실패했더라도 거기에서 주저앉지 말고 기어코 하고야 말겠다는 분투노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가 암시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꼭 해야겠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으며, 조금 힘들다고 머뭇거린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인류가 걸어 온 발자취를 보더라도 비겁한 사람은 아무 일도 못했어도 용기 있는 사람은 큰일을 했다. 그들은 문화와 예술을 창조했고 자연을 정복했으며, 사막을 옥토로 바꾸었던 것이다.
공자는 도를 생각하느라고 밥도 굶었다고 하며,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는 용맹한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노력하기에 따라 위대하게 될 수도 있고 거지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해서 위대한 인간이 된 경우가 많다. 통나무집에서 살던 「링컨」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이라든지 섬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나폴레옹」이 세계를 주름잡게 된 것은 분투노력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 안회(BC 521~490)는 『순 임금은 누구이며 안회는 누구인가?』했다. 즉 안회는 노력하기 따라 순임금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분심을 가졌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왕후장상이 종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고 부르짖었다. 그의 노력에 따라서 왕후장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은 사람은 모름지기 「나 같은 사람은 부처되기 다 틀렸다.」고 퇴굴심을 낼 것이 아니라, 「부처는 누구고 나는 누구냐?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분발심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이 분발심이 아무리 필요하지만 정당한 것이 아니고, 방향도 없고 철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형이 햄릿형, 돈키호테형, 파우스트 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햄릿형은 결단력 없이 머뭇거리기만 하는 형, 돈키호테형은 아무 분별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형, 파우스트 형은 지성과 의지를 아울러 갖춘 형으로 구별한다.
방향도 없고 철없는 분발심은 마치 돈키호테 같은 형이어서 웃음거리만 된다.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 유익한 일, 또는 부처가 되어가는 일이라야지 그렇지 않고 인류를 괴롭게 하는 일이나 나쁜 일이어서는 안 된다.
가령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동조 같은 사람은 분명 용기 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으나 그들은 정당한 분발심이 아니라 잘못된 분발심의 소유자였다. 역사상의 수많은 독재가 폭군 또는 전쟁을 좋아하는 장군들은 분발심을 잘못 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다」고 했다.
정당한 일을 꼭 해야겠다면 성공할 수 있다. 대산법사께서는 『끝까지 구하면 얻어지고, 진심으로 원하면 얻어지고 정성껏 힘쓰면 되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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