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僞」라는 한자는 「거짓위」라고 풀이된다. 매우 묘미가 있는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다 거짓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해학적인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僞」를「거짓위」라 풀이한 옛사람의 그 선견지명에 다시 한 번 감탄할 뿐이다. 세계정세가 그렇고 유엔의 역할이 그렇고 우리 사회의 풍조가 그렇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도 인간이 하는 일이란 철저하게 거짓일 수 있을까? 신문을 보노라면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세상의 부조리에 불감증이 되어버린 사람이거나 죽림칠현 같은 냉소주의자거나 인간의 시비선악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현자거나 아니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상실해버린 정신이상자가 아닌 다음에는 요즘의 신문을 보고 속이 뒤틀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건전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가 역류하는 듯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암담함 현실에서도 한 가닥 밝은 희망이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그것은 이번 가을 들어 10여 곳에서 봉불낙성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개척한 교당도 있고 낡은 법당을 신축한 교당도 있지만 하여튼 곳곳에서 거행된 봉불식은 우리들의 기쁨이요, 혼돈한 이 세상의 한줄기 향기이다. 우리는 일원대도가 만고불변의 대 진리임을 믿는다. 일원의 진리를 이 누리에 불 밝혀주신 소태산대종사의 한량없는 은혜를 더욱 감사드린다. 또한 새 법당을 마련하여 봉불낙성식을 갖기까지 신앙의 염원을 간절하게 불태워 온 여러 재가교도님들과 교무님들의 위법망구한 공덕을 높이 기린다. 곳곳에 세워진 교당에서 일원의 광명이 널리 비쳐 혼탁한 이 세상의 등불이 될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일원의 진리가 여여하고 곳곳에서 새 교당이 세워지고 위법망구하는 재가출가의 일원 사도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이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 것은 종교가 없고 종교인이 없고 지식인이 없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깨친 자가 적기 때문이다. 이 법당은 깨친 자를 길러 내기 위한 첫 걸음일 뿐이다. 새 법당이 세워졌다고 세상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깨친 자가 나오지 못하는 새 법당은 참된 신앙을 소외시킬 뿐이다. 다시 말해서 새 법당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건물을 지었다고 해서 세상이 그만큼 정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깨친 자가 나오지 못하는 새 법당은 생명 없는 건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깨친 자와 깨치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깨친 자가 사는 세상과 깨치지 못한 자가 사는 세상의 차이인 것이다. 깨친 자가 하는 일은 질서와 조화와 균형과 발전과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 자가 하는 일은 혼탁과 부조리와 부정부패와 자가당착과 투쟁을 불러올 뿐이다. 수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첫째로 깨치는 일이요, 둘째도 깨치는 일이요, 셋째도 깨치는 일이다. 우리가 곳곳에 새 법당을 마련하는 것도 깨치는 공부를 하기위한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이 말했다. 깨치기 전에 시비를 논하는 것은 시비 그대로가 다 非가 되고 깨친 후에 행하는 선악은 선악 그대로가 다 善이라 하였다. 또 이렇게 말하였다. 설법을 비 오듯 잘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돌멩이까지 고개를 끄덕인다 할지라도 깨치지 못하고 건혜를 가졌다면 이것으로는 생사고해를 건너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 깨치지 못한 자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깨친 자의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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