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문제가 주는 교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이루어졌던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 방문은 그 공동 성명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쌍방 입장의 재천명에 그친 느낌이 있기는 하나 우리에게 충격적인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더불어 아주(亞洲) 반공(反共)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자유중국의 운명에 관하여 언급한 대목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닉슨」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인정하고 미군의 철수를 궁극의 목표라고 언명한 것은 그 진의는 어떠하였건 간에 사나운 이리 앞에 무력한 친구를 내놓는 것과도 같은 무정함을 느끼게 하며 뒤이어 일본마저 질세라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공표했으니 냉엄한 국제 관계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한 때 세계적 영웅으로 지칭되던 장총통이 영도하는 자유중국 정부가 중공의 「유엔」가입 이후부터 정해진 하나의 궤도를 달리는양 비운에 빠져 들어가는 듯한 인상에 동정을 금할 길 없다. 그렇다고 당장 미군이 철수하고 대만을 중공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아닐 테니 그것이 10년 후의 일일지 백년 후의 일이 될지 모르는 지금 너무 성급한 거론일 수도 있는 일이나 오인(吾人)은 다만 여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력을 상실하고 타력에 의존하는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 받아들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자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 과감한 적폐의 광정(匡正)으로  확고한 대공 자세를 취했던들 오늘의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타국의 압력이 있었다고는 하나 국공합작에 실패했을 당시에 멸공 태세가 갖추어졌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체 정화를 이루지 못하였던 결과가 오늘의 비애를 가져다 준 것이다. 어찌 자유중국에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개인 가정 사회 국가의 모든 분야에 걸쳐 하나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꾸준히 자기 힘을 기르자는 뜻은 얻을 수 있을 것이요, 자기의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비록 타력의 덕으로 일시적 안정은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70년대 시정 목표로 자조 자립 자위의 3개항을 설정한 것도 이 자력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소치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역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그렇다.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외적의 침공을 수없이 받아왔던 우리는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대륙의 강대국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고구려 시대의 품품(稟稟)한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이 사대(事大)의 예로서 섬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다시 사대(事大)사상으로 고착되어가서 종주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평화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말에 와서 결국은 의지하던 종주국의 쇠망과 더불어 망국의 한을 씹어 삼키는 비운에 빠지지 않았던가. 이러한 국가의 형세는 『부모, 형제, 부부, 자녀, 친척 중에 혹시 자기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의지하여 놀고 살자.』는 기풍으로 국민성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여자의 삼종지례는 남자 의존 생활의 제도화를 가져와 무력한 인생의 편만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의타 생활에서 어떻게 자기 유지와 발전을 기할 수 있겠는가.
본교가 이미 반백년 전부터 이 겨레의 적폐에 착안하여 사요의 첫 항에 자력양성을 내걸었고 일상수행이 요법에서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릴 것을 강조하여왔다. 제생의세의 출발을 자력양성에서 구하신 대종사의 성지(聖旨)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우리는 자력을 신앙과 생활에서 얻자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외포(畏怖)나 보상을 통한 신앙에서 벗어나 죄복의 근원을 각득하고 영원한 생명을 탐구하는 데서 울어나는 불퇴전의 신앙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니 의타심을 버리고 자력생활로 옮겨 가는 방법과 결과를 깨닫고 실천하면서 무력한 타인까지도 자력을 얻도록 인도하고 후원하는 자비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자력을 얻게 됨으로써 스스로 떳떳하고 남을 도울 수 있어 화목과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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