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단은 창립 이래, 교화· 교육· 자선 등 3대 목표를 설정, 이 3대 목표를 통하여 우리 교단의 궁극적 사명인 제생의세의 뜻을 펴나가고 있다. 이 3대 목표는 말하자면 우리 교단이 진정 새 종교의 자격으로서 인류와 더불어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한다는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64년이라는 아직 천단하기만한 교단사를 이끌어온 우리 교단은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가며 진리적 종교의 의지를 이 땅에 뿌리내렸고 마침내는 그 기틀을 이루어내는데 온갖 힘을 기울여왔다. 우리 교단 혈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교화의 장, 교육의 장, 자선의 장은 말할 것도 없이 삼위일체의 기틀이며 진리의 장으로서 또는 역사의 장으로서 새 종교가 지향하는 목적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비합리적 의지나 사상 행위도 우리의 「장(場)」에서는 추호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교화· 교육· 자선의 이상이 오로지 「일원 진리」를 통하여 그 한결 같은 기능으로 작용하는 데에서만 우리 교단은 비로소 새 종교로서 또는 새 생명으로서 발전을 기약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교단의 연례적 행사인 「자선의 달」12월을 보내며, 자칫 연례행사가 범하기 쉬운 알맹이 없는 형식으로 굳어지려는 타성의 함정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자선」이 갖는 뜻, 그 바른 사상적 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대체적으로나마 추구해 보고자 한다.
자선은 도덕의 성질 그 자체의 행위임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도덕이 가르치는 종교적인 의의는 곧 모든 도덕적 교계를 준수함으로써 그 의향을 순결하게 보존하고 겸양의 덕을 기르며 설사 사소한 악일지라도 이에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회한을 느낄 줄 알아 스스로 중용과 원만으로 이끄는 행위를 편달하여 죄과와 파렴치를 경계하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악을 버리고 덕을 행하게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악을 행하는데 매우 적합한 기회를 만났음에도 그 악을 정당하게 피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도덕의 실행자라 할 수 있다. 종교인에게 있어서 도덕적 생활은 근본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계만이 반드시 선행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지계의 신수(神髓)는 중생화익(衆生化益)의 전 목적을 위하여 자기를 보존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도덕은 어떤 경우에는 수동적이지만 자선은 언제나 능동적이다. 자선은 살생을 않는다. 도둑질을 않는다 하는 계율의 단순한 준수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희생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구제 행위 자체에서 용솟음치는 희열의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 자선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땅히 「주(住)함이 없는 곳에 주하여 그 마음의 샘물을 길어내는 보시-」법과 진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늘 바른 자세를 갖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이 무엔가 나에게 구하였을 때에는 나는 힘 미치는 데까지 그에게 만족을 주어야 한다.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희사이든 그것은 주는 이나 받는 이에 있어서 다 같이 공덕이 돼야겠지만 그러나 때로는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보다 일단 아래에 머문다. 참된 보시는 계급이나 신앙의 차별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보수도 예기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정성이 담기지 않은 하등의 거대한 시물도 알뜰한 마음이 담긴 한 줌 쌀의 가치만도 못한 것이다. 자선의 목적은 부(富)를 사회화함으로서 인하여 빈(貧)을 도덕화 하는 데 있다.
자선 행위를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늘 타인의 이익을 생각해야 되고 개인보다는 인류 공동체의 복지를 위하여 기여할 바를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들은 오로지 사랑과 선으로 인하여 비로소 일체 중생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생활해야 되는 그 인연을 이해한다.」고 고경은 설시(說示)하고 칙량 하는 것은 다만 그 마음의 태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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