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이전의 도교사상
도교는 고려대에 와서 종교형태 갖추고 무위청정의 교리실천
선인신앙은 통일신라시대의 특기할 사상
당과 문물교류 통해 도교 유행
민간신앙 기반이 된 자연종교로 성장

 중국 고대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중앙집권적 왕조지배체제가 확립된 즈음에 도교 혹은 도교적이라고 불리우는 종교적 집단이 나타났다.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자연종교로서의 도교는 노장사상과 신선사상, 역, 음양오행, 점서, 참위, 점성 등의 제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도교가 장릉이후 체계화되고 난 뒤의 교리를 대강 살펴보면 우주의 근원을 道라 하고 이 도는 一을 生하고 一은 二를 生하며 二는 三을 生하고 三은 만물을 생한다고 노자는 도덕경 24장에서 말하였는데 도교에서는 三은 三元→三氣→三才로 변하여 만물을 만든다. 삼은 삼원의 天上三界를 의미하고 太上老君天師太淸境, 九仙上淸境, 九眞玉淸境 등 三境이 있고 이 삼경의 주신을 三淸이라 한다. 一 은 大羅元界로서 주신은 元始天尊이며 無名의 도는 道君이라는 신이고 제자 玉辰大道君에게 도법을 주어 세상에 선포케 했다고 한다. 천상계는 不死不困의 영생계이고 지상계는 欲, 生死, 貧困이 따르는 고계이며 그 중간계는 무고이나 생사를 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간은 교리대로 무위청정의 생활을 하면 도에 귀일하고 천지와 더불어 장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조에 보면 375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를 끌고 침입하므로 근초고왕이 태자를 파견하여 이를 막게 하였는데 태자가 사기의 말을 듣고 진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북으로 쫓아 수곡성의 서북에 이르렀는데 그때 백제의 장군 막고해가 「일찍 도가의 말을 들으면 知不足辰 知止不胎라 하니 지금 소득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하려 합니까」라고 간언하니 태자는 이 말이 옳다하여 그만 두었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375년 이전에 벌써 도가의 용어가 통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백제 때의 산경전이란 벽돌에 도사 비슷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624년(영류왕 7년)에 당고조 이연이 도사를 시켜 천존상 및 도법을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를 강론케 하고 왕과 국신이 이를 청강하였다는 것이 기록상의 처음이라 실제로 고구려에 있어서의 도교사상의 도입은 이미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성했던 것 같다. 625년(영류왕 8년)에는 왕이 당에 사실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게 하였으며 643년(보장왕 2년)에는 연개소문의 청으로 당에서 도사 숙손 등 8인과 노자 도덕경을 보내왔고 650년(보장왕 9년)에는 보덕이 국가봉도 불신불법이라 하여 백제로 옮겨간 사실 등이 삼국사기 권20과 권21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에 의해 불교세력이 상당히 위축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당나라와 문물교류가 성하였던 신라에서는 상당히 도교가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지할 수 있다. 선도성모설화 옥보고우륵 등 악성의 신선설, 신라사선 설화의 성립, 물계자의 신선설 등이 한국 고유 신앙과 전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삼국시대는 도교사상이 아직 민중과는 밀착되지 못하였으며 일시 고구려에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는 역시 불교의 위세에 압도되어 부분적으로 불교사회 속에 침투되었는데 그쳤다고 보아야겠다. 통일신라시대의 도교의 상황은 청학집이 접하여 준다. 이때 도교는 우리의 무속신앙과 중국의 오두미교적 要陽과 혼합하여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노장의 무위사상, 燕齊方士들의 신선사상, 衍의 음양오행설, 한대의 참위사상 등을 혼융한 도교로 보아야 할 것이고 도교신앙사상이 식자들 사이에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대에 뛰어난 인물들이 대개 도교적으로 미화되어 있는 설화라 전하고 있음으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삼국통일 당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흥무대왕 김유신을 비롯해서 고승으로 원효, 의상, 유학자로 최치원, 최승우, 술사로 김암, 도참 등에게 가탁한 설화가 생겨났고 특히 김가기, 최승우, 자혜 3인의 중국 종남산 광법사 수련설화와 최치원의 청학동 신선설은 해동도교의 연원으로서 후대에 크게 신봉되어 비기와 이적의 기록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특기할만한 것은 선인신앙이다. 선인은 영랑과 같이 나이가 90이 되어도 피부가 어린애 같고 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鐵竹의 단장을 짚고 호수 및 산으로 소요하며 신녀 보덕과 같이 바람을 제어하거나 바람을 일으켜 비를 부르고 금수를 쫓거나 꾸짖는다. 김가기는 수련 끝에 매일 밤 독방에서 선관 선녀들과 담소하다가 승천하였고 김암은 둔갑입성법으로 외적을 물리쳤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인, 방사, 술사는 진인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종교다운 도교는 고려에서는 송의 숭선의 풍이 조금씩 전래하다가 16대 예종 때에는 왕이 독실이 믿게 되어 처음으로 원시천종상을 옥탁정에 봉안하고 달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무렵에 송나라 휘종이 도사 2명을 보내어 법을 전하니 개성의 북쪽에 복원관을 세워 삼청상을 모시고 도관 도사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는 국가와 임금의 기축에 그치고 일반민중의 종교에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성신선사, 죽적사용, 경신을 지킨 것 등이 민속화했을 뿐이다.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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