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단에는 창시 이래 다른 종교 교단에 견주어서 추호도 손색이 없고 뒤지지 않는 훌륭한 교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세상에 정평이 나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또는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솔성요론 1· 2) 이만큼 우리 교법과 제도의 방향지표는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그야말로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것으로서 항상 시대에 앞서 있다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법이 뛰어난 것이고 제도가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운영과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활성화하여 능률과 선용의 가치로서 두루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퇴색돼가고 사장돼가는 무의미한 물건이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교단은 초창기부터 이미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터전을 다지며 그 뿌리를 내려왔다. 교의의 체계나 교단 형성의 기구 등 제반의 제도의 면에서 보여주듯이 그것은 원융무애의 참신한 상징이며, 순환과 조화 자유와 발전의 새로운 기틀인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종법사를 비롯한 수위단원 선거 등 각종의 선거제도만하더라도 일찍이 반세기 이전부터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체질화되어 온 보편적인 가치이며 생활양식이었다. 다만 시대적 추세에 따른 부득이한 도입이라거나 남의 것에 대한 의세(依勢) 원용(援用)이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에 있어서 또한 소홀함이 없었다. 인간성 존중의 의의는 흔히 관념적이거나 추상성에서가 아니라 가위 구체적이요 적극적인 방향으로 창달되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데에는 권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성 존중의 제1의적 단계요, 일단 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소이연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스스로 인정해 줄 뿐 아니라 그 창의와 장소 그 기질과 소양을 충분히 발양하도록 길러주고 도와주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여 마침내는 그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도 한 물건도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살려서 쓰는 일, 반드시 쓰여져야 할 곳에 온통 제대로 활용한다는 이 정신이 지금 교단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주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교정은 교단사의 흐름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는 무엇을 보며 주어야 하는가. 지난날의 우리 교정은 매양 선각적인 한 길에서 선진적으로 교단을 이끌어주었다. 이리하여 우리의 선진들은 암흑의 역사 그 형극과 애로를 슬기롭게 헤쳐 나며 그 가운데에서 오히려 위없는 긍지를 지녔고 새 역사를 열어나가는 주역으로서의 사명에 불타고 있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전진하고 있는가, 후퇴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그 현실이 어디에 사로잡힌 채 정체돼 있는가를 늘 점검하고 다스려서 앞서가는 교단으로서의 새로운 기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일찍이 우리 교정에는 교정의 5대 지침이 뚜렷이 서 있었다.
「공정· 성의· 통제· 융화· 주밀」이 그것이다.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기계론적인 해석만이 능사가 아니라 교단 지도층은 물론 전 교역자가 나와 교단을 통하여 총체적으로 반성해보지 않으면 안 될 주제가 아닌가 한다. 교단은 교정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이라면 교정은 앞에 열거한 교정 5대 지침의 활성화를 기함으로써만 그 바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공정· 성의· 통제· 융화· 주밀(周密)은 우리 교정의 청렬한 맥박이어야 하고 우리 교역자 모두의 전 인격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능동적이고 합리적인 교단으로서 진리의 새 역사를 열어나갈 주인으로서의 정당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만에 일이라도 사리사욕이나 아집 편견 무능 고식 등으로 각색된 허울 좋은 교단주의를 앞장 세워 교단과 세상을 그르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그는 일원대도 그 인과의 거울 앞에 조명하여 쾌쾌히 그 허물을 떨어버리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교단관 올바른 역사관만이 이 교단과 세계를 바르게 향도해 나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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