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십상 성도(聖圖)

지난 3월 31일 교화부는 중앙총부 교정원 회의실에서 열린 전국 교구장 회의에서 「소태산 대종사 십상 성도」를 공포하였다.
교리 교법 교사 성가 및 교재의 완정을 기한지 어느덧 20유 여 성상을 헤아리는 오늘날, 선사 일평생이 끼친 그윽한 유향(遺香)과 생생한 성적(聖蹟)이 이제 열 폭의 동양화(성화)로써 이루어져 그 첫 선을 보이게 된 것은 매우 반갑고 뜻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간 우리 교단은 교리사적 측면에서나 교단사적 측면에서 아직 세계적으로 드러난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할지라도 대종사의 유지(遺志)와 유업(遺業)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만의 일이라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약하면서 재가· 출가가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온 것이 사실이며, 특히 대종사 추모 사업의 일면을 살펴보자면 대종사 일생일대의 그 희귀하신 발자취를 금석의 문자로 새긴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여래 비명병서」(성비(聖碑))가 정산종사 찬(撰)으로 원기 38년(1953) 4월에 중앙총부 영모원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어 대종사께서 대각하신 장항(獐項) 현지에 원기 56년(1971) 10월 「만고일월」비가 세워진 것은 대종사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길이 알리고 전하기 위한 훌륭한 표적이며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동양화가인 정승섭 교우(원광대 사대 교수)에 의하여 최초로 그 모습을 정립하기에 이른 소태산 대종사 십상 성도 또한 이와 같이 대종사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다양하게 (십상을 통하여) 보여주는 현장이 될 것이다. 이 대종사 십상 성화는 역사적 사실성을 근거로 하여 (그 당시로서는 이미 맥박이 끊긴 채 암흑기에 접어든 이 땅이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이 나라의 자연 풍정(風情)과 순후한 생활습속 등, 그런 배경 그런 일상성 가운데서도 오로지 출중 초범한 우주적 새 성자 소태산 대종사의 전생(全生)적 전인적 활약상을 집약 정리하여 이를 단아한 동양화로 이끌었다는 데 특징이 있지 않은가 한다. 예술을 비롯하여 모든 정신적 작업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이 성화의 창작 역시 무려 7년이라는 긴 동안의 구상과 시도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 성취의 보람을 누리게 되었다 하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누구나 다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가 한다. 그 일은 마땅히 저 성자들의 철천의 서원과 구도 고행 못지않은 정성과 공력이 깃들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일찍이 정산종사께서는 대종사 성비 명에서 「……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사용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무상묘의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사사물물의 지류까지 통하시어 일원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삼세에 한없이 열이시었으니 이른바 백억 화신의 여래시오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고 그의 대종사관(觀)을 천명하였으며 다시 대종사의 일대 생애를 십상으로 정하여 주셨으니, 첫째 하늘 보고 의심내신 상, 둘째 삼밭재에서 기원하신 상, 셋째 스승 찾아 고행하신 상, 넷째 강변에서 입정하신 상, 다섯째 노루목에서 대각하신 상, 여섯째 영산 앞에 방언하신 상, 일곱째 혈인으로 법인 받은 상, 여덟째 봉래산에서 제법하신 상, 아홉째 신룡리에서 전법하신 상, 열째 계미년에 열반하신 상이 그것이다.
이는 역사적 대종사의 정초로서 동서양화의 전통적 특성적 기량을 통한 성화의 조성을 비롯하여 음악 연극 문학 등 다양한 예술적 기능으로, 혹은 진리적 사실적 차원에서 혹은 역사적 시대적 차원에서 혹은 도덕적 구원적 차원에서 대종사 십상의 의미는 널리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예술적 창작 활동에 대해서는 교단 문화교화의 차원에서 당무자는 물론 정책적으로 이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며 예술 창작의 발굴과 그 지원 대책 교단문화 교화의 저변확대 등의 문제는 언제나 교단적 과제의 하나로써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대종사관의 확립만이 새 시대의 새 정신을 여는 문화적 정초가 됨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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