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포는 나의 권속이다

요즈음처럼 동포애가 우리의 입과 귓전에 자주 오르내리는 때도 드문 것 같거니와 또 그것이 강조되고 갈망되는 때도 흔하지도 않을 것 같다.
47년래(來) 처음이라고 하는 대수재로 인하여 인명(人命)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으니 집을 잃고 가재도구를 잃은 이재민의 참상에 깊은 동정을 금하지 못하며 당국의 적절한 조처에 의해서 구호에 염려는 없을 것으로 믿고자 한다. 동시에 이 참상을 봄 경향각지의 뜨거운 사랑의 물결은 산적하는 의연금품으로 화하여 동포애의 산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으니 흐뭇한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한편 27년간의 높디높은 장벽을 뚫고 제2차 본회담을 위하여 북한 적십자 대표와 그 일행 54명이 실향민과 온 겨레의 주시 속에 입경(入京)했다. 피아(彼我)의 대표들이 한결 같이 체제와 이념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혈맥이 이어진 동족임을 강조하면서 동포애로 뭉쳐야 함을 역설하고 있으니 이산가족의 재결합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이 사업의 앞날도 진정한 동포애에 의하여 진행만 된다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참을성 있는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포애가 어떤 수단이나 도구로써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순수한 목적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동포애의 발현이 결코 이해타산이나 다른 목적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발생적이며 자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입장에서 본 동포애의 참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종교인의 동포애는 세속인의 동포애보다도 지순해야 하고 간헐성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동포애란 단순한 동정심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동정심이란 현실적으로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보다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애처롭게 생각해 주는 마음이거니와 동포애는 그보다도 더 원천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재민을 돕고 이산가족을 도와주려는 그 심정이 동포애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증적으로 발현되는 동포애는 일시적으로 유동적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반심과 퇴굴감마저 불러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포애의 무진한 원천을 가꾸지 위한 몇 가지의 마음공부가 곁들여져야 될 것으로 안다.
첫째, 인연(因緣)관에 투철해야겠다는 것이다. 동포로서 공동운명체의 일원이라는 멍에를 같이 짊어지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일 수는 없다. 숙겁의 인연에 의하여 맺어진 그래서 동족관계는 자의로 거부도 탈락도 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국적을 바꾼다 해도 그 혈맥은 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서로가 아끼고 소중해 하는 애정을 갖게 될 것이다.
둘째, 대자비심을 가꾸어야 할 것이다.
너와 나의 구별을 초월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분별을 떠난 완전 융합이 대자비심의 자세이다. 따라서 동포애는 넉넉한 자나 강한 자가 어려운 자나 약자를 위하여 베푸는 온정이 아니요, 자기의 피육으로 느끼는 아픔인 것이어야 한다. 만ㄴ약에 동포애를 온정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우월감이나 행위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는 데 떨어지기 마련이니 진정한 동포애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동포애는 체질화된 것이어야 한다. 특정의 시(時)와 장소를 국한하는 동포애가 아니요,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동포애에 직결되는 것이어야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동포가 내 권속으로 보일 때 인류가 내 권속이 될 수 있고 내 권속이라는 동포애가 울어나는 것이니 어떤 다른 야욕에서 불려지는 동포애가 아닌 참모습의 동포애가 남북적십자 회담에 순수하게 작용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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