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달 6월」을 보내며-

6월 1일은 대종사께서 열반상을 나투신 날이며 아울러 우리 교단 공동의 대향일로서, 교단에서는 6월 1일 이날을 비롯하여 이 달 한 달 동안을 『추모의 달』로 제정하여 대종사 이하 역대 스승님과 선조들에게 추모의 정성을 올리고 추원보본의 뜻을 모아 이 누리에 「법계의 향화」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돌이켜보자면 대종사께서 열반하신 해가 우리 원기로 쳐서 28년이니 햇수로 37년, 이제 우리들은 대종사 열반 37주기를 맞게 되었다. 개법(開法) 28년, 세수 53세로 이미 열반하신 대종사께서 아직 돌아가지시 않았더라면 아마 89세의 장수 고령으로 살아계실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2,500여 년 전의 불타나 혹은 1,900여 년 전의 예수와 같은 아주 옛날 그 옛날의 분이 아니라 근세에 나셔서 근세에 사시다가 근세에 돌아가신 대성자로서 그의 끼치신 뜻과 덥ㄹ어 그의 정신 생명 사상과 절세적 경륜 등 그의 숨결과 발자취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역력히 살아계시는 듯 하다. 한 외국인 종교학자는 몇 년 전에 우리 중앙총부를 방문하고 그 소감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원불교 중앙총부에는 종법사님을 비롯하여 대종사님 당대의 직제자 여러분이 아직 건재하셔서 대종사 재세시의 새 회상 새 부처님의 언행이나 일상 등이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는데, 이야말로 큰 행복이다. 이처럼 복 받는 교단, 복 받은 교도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눈에 비치는 대로 마음으로 느낀 그대로의 「초기 교단」의 신선한 감동을 솔직히 피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언제까지든 이렇듯한 초기 교단의 그 안온하고 단란한 행복 속에서 안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초기 교단은 초기 교단이 지닌 역사적 성격의 한 반영인 것이며 긴 역사를 통하여 그 주체는 항상 전변하고 발전하는 그 가운데에서 능히 작요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교단의 그 신선한 감동은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으로 간직되면서, 대종사께서 제시하여 주신 「제생의세」의 사명은 곧 이 교단을 통하여 새 역사의 과업으로 활성화하고 길이 인류 평화의 한 길을 비춰주는 횃불이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일이다. 대종사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37주년이 되는 오늘날, 우리들은 모두가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참회 반성해 봐야 할 때이다. 우리들은 대종사의 제자로서 어느 모로 보나 과연 손색이 없다 하겠는가? 신앙과 수행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인격과 생활의 면에서, 또는 진리와 역사 앞에서 우리들의 자세는 진정 구김없이 떳떳하고 당당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그 무엇이란 말인가? 저마다의 서원에 비추어 돌이켜보고 진리의 뜻에 따라서 바로 잡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종사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그 마지막 유교(遺敎)에서「그대들이 나의 법을 붓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도 중한 일이나 몸으로 실천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말고 후세에 이 법통이 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중한 일이니, 그러하면 그 공덕은 무엇으로 가히 헤아리지 못하리라.」하셨다. 대종사의 일생일대의 포부와 진리의 뜻을 글이나 말을 통하여 전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이지만, 그 「참의 뜻」을 스스로 인격화하고 그 참의 실체를 저마다 생활화한다는 것 그리하여 이 법으로 하여금 생명의 공동체를 깨닫게 되는 데에서 인류의 큰 꿈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들이 대종사께서 물려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곧 일원상이다. 일원의 진리는 새 진리 새 생명 새 역사의 주체적 공동체로서 우리들 마음속에 갊아 있는 밟음과 사랑 조화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뜻을 스스로 증득하여 인격화 생활화하는 것은 우리들 원불교인의 궁극적인 본분사이며 당위이다. 일원의 진리, 그것은 또한 제생의세의 사명이 추구하며 성취해 나가야 되는 새 시대의 논제인 것을 우리들은 늘 새롭게 자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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