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의 자율정화문제

범국민적 사회정화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요즈음, 종교계에도 바야흐로 그 정화의 물결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정화의 대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교단이나 종단 내부의 고질적인 교권 이권 분쟁, 교역자의 자질문제, 종교 재단 운영의 비정상 사태, 반사의 반도덕적인 축재와 사치 등 종교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체의 비리비위행위이다. 그래서 범종교적 정화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에도 중앙을 위시하여 각 교구에 이르기까지 자율정화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논의할 것까지야 없지만, 신앙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정교 분리는 이미 헌법상 보장돼 있고 국교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국가는 종교에 대하여 신앙의 엄정 중립성을 지켜 나가는 것이 원칙으로 돼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원불교의 입장에서는 원불교 교도의 한 사람이요, 나라의 입장에서는 또한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저버리고 살아갈 수가 없듯이 종교라는 것은 반드시 어느 특정한 국가 사회 내에서 포교나 교화활동을 벌이기 마련이고 그러자면 종교의 일상적인 교화활동의 혹은 사회적 규범이나 국가적 질서와 알력 관계를 빚을 수도 있겠는데 이때에 가령 종교적 비리가 노정되었을 경우에라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를 제재하는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과 배경이 없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의 자유가 그 배경이요, 정교 분리의 원칙이 그 현실 상황이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종교라는 대하, 스스로 도도한 그 흠의 질서를 존중하는 뜻에서 종교 자체의 자발적 자율성을 통한 창조적 작업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평가되어지는 것이다.
이제 국가와 종교는 이러한 원칙적인 문제에 대하여 자타가 다 같이 긍정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번의 종교계의 정화작업이 과연 자율이냐, 타의에 의한 것이냐? 할 때 타의에 의한 자율이라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반성하여야 하고 정말 정화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사실에 대하여 충분히 시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쨌든 그 누구에 의한 진단이든 간에 뻗어갈 대로 뻗어버린 병근(病根)과 환부는 뗄 수 없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래서 종교라는 집단의 그 집단적 이기주의 생리나 상태라는 것도 지금이 아니라 이미 다 알려질 대로 알려져 버린 숨길 수 없는 치부가 돼버리고 말았는데, 누가 이 세상이 병들었다 썩었다 또는 말세라고 거리낌 없이 부르짖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저 서축의 유마힐은 중생의 병 때문에 나 역시 병들었다.(중생병고오역병(衆生病故吾亦病)) 고 그의 병석을 찾아간 문병객들에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한다. 오늘날의 종교인은 왜 이렇게 떳떳하고 유연할 줄을 모르는가. 왜 중생의 병으로 나의 아픔을 갖지 못하는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 우리 종교계에 천의 유마거사, 만의 유마의 재현이 반드시 요청되고 필요한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터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것이 「개벽의 주체」로서 열린 혼(魂) 산 정신으로 이어진 「거듭남」이 나만은 못하다는 자각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는 항시 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정화의 대상에 대하여 우리 교단으로서는 물론 해당사항이 없다고 하겠지만 이것이 대안(對岸)의 화재일 수만은 없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나의 아픔, 나의 부끄러움인 것만은 틀림없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도 하지만, 티끌세상 티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종교인들 과연 어찌하겠는가? 이 세상 세속적인 모든 병, 종교의 허물인 것을 깨닫고 이것들을 모름지기 다 조용히 우리들의 안으로 받아들이자. 종교가 세계 정화의 연원인 것만은 지금 누가 뭐라 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이 세계정화의 연원 속에는 영원한 종교의 동맥이 깊이 스며들었고 우리들의 서원이 어리어 있다. 종교정화, 나라와 사회정화, 인간정화의 새 물결이 부디 우리들의 연원에서부터 끊임이 없이 맑고 새로워지기를 이 기회에 다 같이 다짐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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