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총부 및 산하 각 기관에서 봉직하는 교무와 전국 각 교당간의 자매결연이 지난 9월 중, 종법사님의 특별유시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은 이미 보도를 통하여 알려진 사실이다. 금번의 자매결연 상황을 대충 살펴보자면, 총부를 비롯하여 교육· 자선· 언론· 문화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180여 명의 출가 교역자와 결여대상은 140여 교당인데, 교당에 따라서 한 명 또는 두 명의 교무까지 배정되어있다. 도시의 유수한 교당들, 해외의 각 교당, 그리고 교화인력이나 모든 여건이 충당돼있는 교당은 물론 이번 결연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결연의 취지나 목적은 우리 교단 3대 목표인 교화 교육 자선의 원활을 기하고, 교화자의 자질과 역량 및 기능을 확대 응용하며, 교화활동을 실지 단련하기 위한 것이라 밝혔다. 한편 해당 교무는 년 10회 이상 결연교당에 나아가서 정례예회는 물론 각종 법회와 특별행사 봉공활동 등에 반드시 참여하여 교무의 본령인 교화의 사명을 펴기로 하였다.
자매결연이라는 것이 우리들 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회 일반에서 행해지고 잇는 일이요, 근자에 자매결연에 관한 종법사 유시가 내려진 것 또한 시선에 맞는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평소에 교화 분야의 이런 저런 체험이나 계획 같은 것들을 예상하지도 못한 처지에서는 자기 뜻이 아닌 타의로써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겠고 혹은 갑작스럽다는 표현도 나올 법한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어느 때나 그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 「교무」라고 하는 자신을 져버리고서 살아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의 보편적인 인격이 있듯이, 교무라는 것은 원불교의 보편적인 삼여이다.
교무는 가르치기를 힘쓰는 사람이다. 자기를 가르치기를 힘쓰고, 동시에 세계를 가르치기를 힘쓰는 일이다. 그 가르침은 일시적이거나 관념적 피상적이어서는 안 되고 마침내는 진리와 영원의 생명으로 구제를 성취하는 길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교화자의 위치를 승려니 신부, 목사니 성직자니 하여 상징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 감각으로 존승 하는데, 우리들은 이미 그러한 거창한 수식이나 장엄 같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교무이다. 그게 직업이든 인격이든 사명이든 또 무슨 가치의 것이든 그대로 교무면 족한 것이다. 그 누구 앞에서도 군림할 것 없고 구태여 굴기하심(屈己下心) 할 것도 없는 평탄하고 의연하고 겸허한 자세, 여기가 곧 교무가 서게 될 위치이기도 하다.
원불교 교역자는 이러한 위치에서 누구나 다 같이 교무이다. 동시에 교무는 교화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찍이 대종사께서는 「그대들은 나의 스승이 되고, 나는 그대들의 스승이 되자고 일러주어라.」하고 한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서로가 다 스승이 되어주고 교화자가 되어줌으로써 인류의 도덕문명은 향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인(全人) 교화」 또는 「무비(無非) 교화」의 폭넓은 뜻이 우리 교무의 본질 속에는 진작부터 갊아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교무님 중에는 간혹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눈에 뜨인다. 요즈음에도 흔히 듣게 되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분류법은 분명 우리들의 처지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사업기관에서 일하는 교무라고 해서 교화의 사명에 대하여 주저하고 기피하는 태도나, 공부나 교화의 우위성만을 내세우며 우유부단 하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의 경향은 마땅히 다 같이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세로는 진리를 돈연히 지닐 수도 없고 도대체 바른 일을 행해 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병행」이다 「영육쌍전」이다 하는 것은 말로만 옳은 소리라고 들어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시에 하나의 생명체이며 둘로 갈라질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따라서 나뉘어져 가지고는 살아갈 수가 없음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다. 천백억 화신으로 확산하지만 그것은 본래에 역력히 자재하는 하나 아닌가.
돌이켜보자면 우리의 교화는 교무라는 전법의 매체를 통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이어져왔다. 역대 교무의 그 숨은 발자취와 공덕, 그 피와 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교화의 역정들을 여기에서 어떻게 다 말하고 그 한 조각 그림자인들 보여주겠는가. 지금 우리들의 처지에서는 선진들에게 비하여 넘나도 죄스럽고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케 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제반의 교화부진상태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해명할 것인가? 우리 교화는 그 누가 보더라도 부진할 것이지 활발한 편이 못 된다. 시대의 풍조 자체가 물량화다 산업화다 하는 비종교적 상황으로 내닫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휩쓸려가고 있는지도 모를 그러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화부진 원인이 어찌 교화 일선의 교무에게만 있다 할 것인가? 우리 교무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일대 반성하고, 자매결연의 당위적 의무는 물론, 교화자의 사명이 이때를 기연하여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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