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어느 날, 로봇 같은 기계 한대가 이틀 만에 수십 마지기 논의 벼를 다 베어냈다. 옛날 같으면 수십 명이 동원되어 며칠 동안 꼬박 해야만 끝낼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볏단만 남겨진 논은 삭막한 풍경으로 변했다. 벼 이삭을 쪼는 새들마저 떠나버리고, 윙- 윙- 하는 문풍지 소리로만 스산한 칼바람을 느끼는, 시베리아 벌판 같은, 텅 비어있는 논을 바라보는 나는 그 어떤 꿈도 희망도 행복도 품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죽음 같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도 저마다 생명은 자랄 것이고, 그 긴 밤, 외로운 사람들의 고독과 기다림과 사랑은 더욱 뜨겁게 꿈틀 거릴 것이다.

12월이다. 2010년을 향해 우리는 다시 새 출발을 설계한다. 그러나 그 마음 한편에는 시작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다. 1999년 12월에도 그랬다. 새천년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졌고, 그렇게 카운트다운하며 요란스럽게 맞았던 2000년에도 지구는 무사했고, 여느 해처럼 다사다난하게 흘러갔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늘 세기말이 아닌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요즘 영화계의 화두는 화산폭발, 지진, 쓰나미 등의 재난이다. 지구온난화로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이것만한 영화의 흥행소재도 없을 것이다. <인디펜던스데이>에서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미국 대통령을 등장시켜 미국 패권주의를 드러냈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2012>에서 지구 마지막 날의 재난을 다뤘다. 그 내용은 IMF 당시 상영하여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비슷하다. 여객선이 지구로 바뀐 것뿐이다. <타이타닉>처럼 <2012>에서도 인간은 자연 앞에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과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들의 여러 가지 모습들, 끝까지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들과 상류와 하류의 서로 다른 삶의 방식 등이 보여 진다. 이 영화도 끝내는 인류애와 가족애로 인류멸망을 극복하는 희망을 메시지로 남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구멸망은 끊임없이 회자됐다. 마야의 달력이나 중국의 주역,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등에 등장하는 지구 최후의 날은 2012년 12월 21일이다. 이제 지구 멸망까지는 2년밖에 안 남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구멸망을 외계인의 일처럼 재미있게 관람했다. 영화의 스케일에 압도당해서 일까. 인간의 만화적인 상상을 만화가 아닌 영상으로 표현하는 그 기술의 진보를 나는 더 즐겼다. 아무렴 어떤가.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지만 영화관에서 상영이 되면 관객의 작품이 된다. 그것은 관객의 감상이나 해석이 감독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는 말을 즐겨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대학의 교수를 그만 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동안 원불교신문에 글을 쓰면서 즐거웠다. 내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다보니 글도 비주얼하게 쓰려고 했다. 독자들이 내 글을 영화 한편 보듯이 읽었다면, 그리하여 창조적인 영감을 받았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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