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는 원불교의 지상과제로써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화하지 않는 원불교란 마치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때문에 원불교의 모든 기관은 그 업무가 사, 농, 공, 상 어디에 속하든지 교화의 도량이 기본적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교화의 도량이란 법신불일원상을 모시는 장소가 되어야 된다는 극히 형식적인 면을 뜻함만이 아니다. 교화의 주체인 교역자가 항상 살아있어서 교화의 대상자를 찾는 활동이 꾸준하고 집요하게 약동하고 명실공이 교화의 도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화란 뭣인가. 교화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교화란 교역자가 있어서 교화의 대상이 되는 타인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활동이다. 때문에 교화활동은 우선 주체가 되는 교역자가 그 대상자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대상을 찾되 어떠한 대상을 찾는가가 그 교화의 질을 판가름 할 뿐만 아니라 종교 본래의 존재이유에 대한 대답도 되고 또 성인정신을 이어 받은 떳떳한 참의 교역자인가 아니면 성인정신은 다 집어던지고 어느 사이 무당이 되어버린 교역자인가를 판가름해주기도 한다. 지금 원불교의 대상이 누구에게 역점을 두고 있는가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 해답은 구구한 이론을 전개할 것도 없이 일요일의 법회에 어느 계층이 가장 중심세력이 되어 있는가를 직접 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총부에서 열리고 있는 추계교역자훈련 과정에서 각 교당의 성공사례발표가 있었다. 하나같이 정성과 혈심으로 점철되어 있는 교역자의 자세는 참으로 훌륭하였으며 느낀 바도 컸었다. 그러나 뭣인가 흐뭇할 수만은 없었다. 오히려 슬픈 감정이 솟아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교화의 대상을 편안한 자, 억울하지 아니한 자, 눌리지 아니한 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욱 기가 막히게 우리의 현실을 직시케 하여준 것은 타의 교단에서 경영하는 눌린 자를 위한 사업장인 나환자의 집에 방문한 것이 성공사레로 보고되고 또 이를 퍽이나 뜻있게 감탄하며 경청하는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가 직접 설립하지 못하고 남의 교단에서 설립하여 그들의 교리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업장을 방문하여 위문이나 하고 다니는 것을 성공적인 교화활동으로 여기고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한 활동을 나무라거나 탓하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로는 훌륭한 활동이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다만 그러한 일마저도 엄두도 못내는 교역자가 많고 또 그러한 일이 지금 교단에서 성공사례로 의젓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자체반성을 하자는 데 우리의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화의 대상을 편안한 자, 더욱 부를 추구하려는 자에 역점을 두어왔다고 해도 과연 누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한다. 그런데 의사가 엉뚱하게 환자는 외면하고 건강한 사람만 골라 치료하겠다면 그 의사와 병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교화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다 외면에 버리고 교당의 세력을 확충하기 위항 교당이 필요로 하는 자들만을 교화의 대상으로 끝내 삼겠다면 이 교단이 어떻게 될 것인가 깊고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 교단은 인류니 세계니 우주니 하는 말을 곧잘 쓴다. 기도도 세계평화기도란 말을 흔하게 쓴다. 도대체 그 인류란 세계란 또 우주란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어떠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로 없이 우리의 이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바로 이웃이 세계요, 인류요, 우주인 것이다. 병들고 억울하고 눌리고 그래서 사람 같지도 않게 사는 이웃에 평화와 안락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집단의 힘이 우주나 세계에로 힘이 뻗어나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도 우리의 교화력을 집중화하고 체계화하여 성인정신에 입각한 교화의 대상을 찾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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