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될 신체장애자에 대한 교화의 분야가 일개 교당의 학생회에 의해서 개척되고 있다는 흐뭇한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것은 서울에 있는 사직교당 학생회 회원들이 지난 4일, 한글점자가 만들어진지 50주년이 되는 날에 위인전을 점자로 찍어 맹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낸 일이다. 그들 맹학생들은 7개월 동안에 걸쳐 정안자들이 읽어주는 것을 네 벌 찍어 점자 도서관 등에 기증하였다. 그들이 직은 점의 수는 3백42만2천점이나 되었으며 권수는 5권에 이른다고 한다. 실로 역사적이며 훌륭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어린 맹학생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은 잊은 채 동지들을 위한 희생적인 노고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2년 전에 이미 원불교 교전을 점역한 일도 있는 학생들로 지금 하나밖에 없는 국립점자도서관에 진열되어 전국의 8만 맹인들의 심안을 열어주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한국의 위인 한분의 생애를 점역함으로써 3천권밖에 없는 점자도서관에 참으로 귀중한 새 책 한권이 불어났다니 이 얼마나 흐뭇한 소식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신체장애자에 대한 재활의 분야가 공백지대이다. 그 수효의 파악에도 정확한 통계가 없을 정도이다. 지난 72년과 73년에 자행회(恣行會)에서 실시한 표본조사를 근거로 심신장애 아동이 전국에서 35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성인 장애자를 합하면 훨씬 많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확하지 못한 통계는 그들이 얼마나 잊혀진 지대에서 소외와 냉대 속에 불안을 안고 살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소외와 불안은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의 불안과 고민으로 이어진다. 안으로 항상 웃음이 없는 그늘진 가정이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채 사회가 건전할 수 없고 또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총화가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국제신체장애자 재활협회에서는 70년 9월 테헤란에서 회의를 갖고 70년대를 「재활의 10년」으로 정한바 있다. 이에 세계의 선진국에서는 장애자들에 대한 복지법을 제정하는 등 이들에 대한 사회참여를 위한 뒷받침에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직도 이방면에 손을 실겁게 대지 못하고 있는 때에 교전을 비롯 위인전 등이 점자로 번역되고 그것도 맹인학생회원들 스스로에 의해서 또 거기에 교단적인 지원이나 정책에 앞서서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적인 감동과 눈물겨운 고마움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그들의 외로움과 아픔과 그늘짐과 불안이 바로 우리사회와 우리교단의 것이란 일체감을 가지면서 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아울러 당국에 이 방면에 정책적인 배려가 있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역사적 과정에서의 원불교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이르는 곳마다에서 정신적 도덕적 가치관과 기강을 은혜로움이라는 바탕위에 세우는 일이다. 사회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해도 무관심하며 오히려 자체내부는 엄숙주의로 기울어져 지상낙원의 건설보다는 내세에만 집착하고 이웃이 슬픔과 불안에 충만해 있는데도 자신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소승적 복리신앙에 기울고 그래서 교당을 우상화하며 사회생활은 눌린 자보다 누르는 자의 편에 서서 내세관을 가장 유일한 교화의 도구로 삼는다면 역사의 과정에서 어찌 원불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겠는가. 어린 맹인학생들에게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시켜 마음에 은혜의 바탕을 마련케 하고 거기에 정신적이요, 도덕적인 가치관과 기강을 세워주는 기초훈련이 없었던들 그들의 고사리 같은 나약한 손에 의하여 점자 교전과 도서가 번역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불교인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뉴프론티어의 정신을 발견하면서 더욱 용기와 슬기로 매진할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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