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교화에 앞장 설 터

북녘 땅에서 새 삶을 찾아 남으로 온 그가 돌연 '원불교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새터민 1호 전무출신인 셈이다.

그는 처음 '출가'의 권유를 받았을 때 "왜 나보고 자꾸 출가 하라고 합니까"라고 되물으며 화를 냈다. 그리고 추천한 교무를 향해 "나는 할 것도 많고 원불교 교리도 모른다. 출가는 절대로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그가 원불교 덕무를 지원했다.

11일 출가식을 마친 이원각(46) 덕무. 1994년 제3국을 통해 귀순한 그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며 여러 종교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던 중 김대선 교무(현 문화사회부장)를 만나게 됐다.

김 교무는 당시 성동교당에서 평화의 집을 운영하며 새터민들의 한국생활을 돕고 있었다. 김 교무는 이 덕무에게 원불교와 자매결연을 제의, 새터민 5명과 함께 강남·종로·전농교당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전농교당(당시 이운숙 교무)에 다니던 친구 2명이 일요법회에 참가하며 마음공부를 했다.

친구따라 간 원불교에서 여자교무가 법회를 주관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 이단 종교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사실 이 덕무는 원불교를 불교로 생각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래서 법회에 자주 가지 않고 4축 2재 큰 행사에 참석만 해 왔다.

하루는 이운숙 교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리산에서 5대 종교가 한국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는 데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성동교당의 평화의 집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김대선 교무는 같이 일하게 된 그에게 늘 출가를 권유했다. 이 덕무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사실 원불교 교리도 모르는데 어떻게 출가하느냐"고 반문하며 매번 거절했다. 하지만 김 교무는 포기하지 않고 이 덕무를 거듭 설득했다.

결국 그는 '성직자의 길이 얼마나 좋으면 아들 2명이나 출가시키고 또 나까지도 출가 시키려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래서 그는 "출가를 해 보겠다"고 항복했다.

이 덕무는 원불교에 입교하고 전농교당 일요법회에 열심히 다니던 시절에 대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기쁨이 함께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때 들었던 인과법문, 교리들은 내면의 울림이 되어 한국 사회에 대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덕무는 "남과 북을 경험한 사람으로써 통일이 되면 고향과 북녘 땅 전역에 원불교를 알리고 싶다"며 "고향사람들과 친구들을 교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걱정이 앞선다. 새터민 1호 전무출신이라는 긍지와 함께 잘 할 수 있을까, 누를 범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며 사회의 모범이 되고 타인의 모범이 되어 후회없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 덕무는 "통일은 대종사님 말씀처럼 잠자고 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라 확신한다"며 "북한교화를 준비하여 통일 이후 할발하게 교화의 장을 펼쳐 보이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