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수양과 정의실천
인격수양은 혼자만의 외로운 길
수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반드시 불법 활용해야
죽기로써 정의 실천하는 용기 아쉬워

마음먹기 하나로 삼천대천세계 밖에 안주할 수도 있는 이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만 있다면야 너나없이 제자리 제 분수에 편안히 눌러앉아 서로 부딪치고 싸우고 엇맞는 일 없는 여여한 인생을 살 수 있으련만 지금 세상에 그것이 그렇게 되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 쉴 새 없이 망념이 일어다, 꺼졌다 하니 이것은 도시 제 마음을 잠시라도 제 마음대로 붙잡아 두기는커녕 육경에 끌리고 오욕에 치달아 온통 제 정신을 잃은 줄도 모르고 몽환 중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 불의와 부정이 미만하여 한 시도 속 편하고 들뜨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원래 사람의 욕심이라 다른 동물의 그것에 비하여 극히 다종다양하다. 유형무형의 욕구가 질과 양에 멋까지 취하려고 하니 여기에서 파생되는 억지와 비리 또한 8만 4천 가지로 많다.
하기야 우리의 살고 싶은 마음 바로 그것이 뭣인가를 늘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 자체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될 것이나 가질 래야 가질 수 없는 것을 기를 쓰고 탐을 내며 또 가져도 한량없이 갖고 싶어 하는 까닭에 삼계열뇌가 화택(火宅)을 이룬다.
그러기 때문에 이를 대치하기 위하여 천지만엽으로 벌어지는 이 욕심을 제거하는 온전한 정신을 찾아 마음의 자립력을 양성하기 위한 방편 법문 수행의 길 또한 8만 4천 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상불 이 수행의 길 자체가 저 혼자만의 외로운 길이어니 그 행로에서 닦는 공부가 어찌 외롭지 않으랴마는 그보다는 일일시시로 몸을 바르고 마음을 밝히는 공부가 모두 어디까지나 저와 외로운 길이며 뿐만 아니라 천하의 등불이 다 꺼져있어도 내 한 등만은 높이 켜들어 천하를 밝혀야 하고 세상이 온통 병들어도 나 혼자만이라도 성해 남아서 제생의세 해야 하니 더더욱 외로운 길인 것이다.
나 같은 무명 중생 숙업이 중중 하다 보니 밖으로 내닫기만 하고 사망(邪妄)에 흐르는 한 마음 다스리기가 죽어라 힘들고 고쳐야 할 고질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
이제 불문곡직 나의 모는 것을 일단 도방하 하고 새 생활, 새 출발로 거듭나는 공부를 시작 하자매 누구나 맨 먼저 온전한 정신을 얻는 공부, 염불, 좌선, 기도로 길을 들이게 되는데 그 여러 과목, 방법 가운데 나는 좌선· 기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느낀 일이지만 좌선의 맛을 모르고 원불교 수행의 맛을 말할 수 없고 기도의 그 사무치는 원의 감격을 모르고 원불교 신앙의 맛의 극치를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나는 그 중에도 기도는 좌선까지도 곁들일 수 있어 기도를 더욱 좋아한다. 스스로 타이르고, 스스로 격려하고, 스스로 채찍질하고, 스스로 꾸짖으며 한 마음 챙기기에 적공을 들여 보지만 다생의 구습과 육적(六賊)의 엄습으로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
내 비록 불연이 더디 띈 박복 중생임을 통감하고 정성만은 배로 들여야 한다고 자신에게 단단히 다짐하고 열심히 덤벼든다.
기도 뒤 느낌이 오다가다 반량이나 차면이어니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진전이 없는 성 싶거나 헛 기도를 드린 성 싶은 때에는 진정으로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 부끄러우며 내가 이토록 무능한가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눈물만 나와야 우는 것인가 그야말로 영혼의 명인(鳴咽)인 것이다. 한 해 두 해 이렇게 해를 거듭하는 동안 앉은 자세며 조식의 묘를 끊임없이 궁리하면서 공부의 요령을 자득하고 때로 참회하고 때로 분발하며 그저 일과를 거르지 않기로 공을 들이다 보니 혼자 짐작에 다소 자리가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고, 법신불 사은님이 말할 수 없이 간절하게 마음 깊이 와 닿는 것 같기도 하고, 가속이 붙는 느낌이 갖는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 참 주인의 모습을 보기는커녕 그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한 아쉬움이 늘 떠나지 아니 한지라 입정 때 망념이 치성하여 다스리기 힘들 때나 망중(忙中)에 한(閑)을 즐길 때나 혹은 잠들기 전 잠시를 의례 「참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찾아보는 것으로 화두를 삼고 캐고 또 캐고, 찾고 또 찾고 나의 그림자를 참 나에 한 살로 겹치도록 까지 밀어다 부치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던 힘겨운 씨름도 이즈막에는 제법 오래 버틸 수 있게 되었다.
한 곳을 장시간 응시할 수 있는 시력이 생긴 것일까?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여 제 정신이 좀 돌아온 것이다. 그 얼마큼 돌아온 정신으로 내 모든 것을 안으로 돌이켜 비춰보고 나의 일상거지를 돌아볼 때 그런대로 어렴풋이 나의 분수를 알게 되고 분수를 알기 때문에 그에 안주하는 힘을 얻게 된다. 분수를 모르고 요란했던 내 마음이 안정을 얻으니 세상이 자연 조용해질 것이 아닌가?
한편 온전한 생각을 얻어 마음에 자주의 힘이 생기고 보면 칠정(七情)에 초연하여 정의를 잃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어니와 원래 수행의 결과한 정의 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백 번 수행이 도저하다 하더라도 수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기 때문에 그 수행의 힘은 반드시 제생의세 하는 보살행 곧 불법 활용의 활법 행으로 나타나야 그 목적을 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행이 어디 그리 쉬운가? 용기!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반이축 수천만인 오왕의(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스스로 반성해서 내 바르다면 천만인이 가로 막아도 나는 나갈 것이로다.」의 기개가 없이 어찌 정의 행을 할 것인가? 그야말로 「자반이참괴(自反而慙愧)」다.
칠정(七情)에 흘러 정의를 잃는 일이 없기로 멈추고 돌아보고 참회하는 공부와 죽기로써 불의에 가담하지 않는 소극적인 정의 행을 자신 있게 다짐하면서도 죽기로써 정의를 실행해야 하는 적극적인 정의 행에 대하여는 그 범위를 내 힘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음을 서글프게 생각한다.
하기야 제가 닦은 힘만큼 제가 저를 알고, 남을 알아보고, 이웃에 법력을 미치는 터에 나에게 있어 높은 차원의 정의의 실행은 더 두고 볼까보다.
<정읍교당 교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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