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종교단체는 고유의 건축양식을 갖고 있다. 불교의 사원이나 가톨릭의 성당, 기독교의교회 등이 다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만 보고도 사원이나 성당교회 등을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불교 교단은 60여년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고유한 교당 건축 양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이것은 창립 당시부터 포용성과 융통성을 지향해 온 교단의 체질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교당건축을 잡다하게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간 원불교 교당 건축 양식에 대한 논의가 가끔 전개되기도 했다. 지난 5월에 재가청년회원 중 공대출신 건축공학도 10여명이 모여 「원불교 건축양식에 관한 세미나」를 가진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이 모임은 교단행정 당국의 주선에 의한 것이 아니요, 재가 청년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 할만하다. 이들은 오직 교단의 장래를 생각하고 원불교적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교당의 건축을 연구하여 교단에 기여하려는 순수한 뜻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출가교역자들과 교단 행정 당무자들은 이 분야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은 물론 행정적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연구태도를 가져야할 것이다. 이들 젊은 건축공학도들은 중앙총부나 원광대학, 영산성지 등은 졸속을 회피하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오랜 시일이 걸리더라도 원불교적 혼을 영상화한 예술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또한 지방의 대소교당 건축도 그 시대와 지역사회의 특성에 맞고 외형에 지나치게 얽매이지는 않되 종교의식에 적당한 내부적 구조와 원불교의 상징성을 잘 살려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들은 앞으로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는 교당신축을 위해서는 지도하고 협력하고 심의할 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겠고 최저한의 기본계획에 의한 건축이 되어야겠다고 했다. 따라서 행정당국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검토가 있어야함은 물론 젊은 건축공학도들의 지혜와 의지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수용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 미술, 원불교 의식, 원불교 음악, 원불교 복장 등에 이르기까지 원불교적 특성을 잘 살리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선 시대사조에 그대로 편승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불교인의 죽음
 지난 5월 어느 날 서울 정릉의 초라한 판자 집에서 60여세의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 인간의 죽음은 상도라 한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낡은 판자 집에서의 어느 죽음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는 한때 교육계에서 또 행정계에서 국가에 상당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 때 이름이 잘 알려진 불교인이었고 한국불교와 중국불교의 유대강화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의 업적에 비해 그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의 장례식도 초라했다. 이는 그의 평소 생활태도가 불러들인 결과이기는 하겠으나 한국의 불교인으로서 반성할 점이 없지도 않다. 그는 재승한 사람이었고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대한 의욕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불교계의 한 종단에만 철저하지 못했고 몇 개의 종단에 동시적 관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한국 불교계의 세계시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버림받은 고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한 종단에 철저하지 못했던 그의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불교계의 고아로 만든 책임이 불교계에도 다소는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계의 아집과 배타성, 거기다가 파당성 등에 그는 환멸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종교의 근본자세는 한 인간도 버리지 않고 다 제도하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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