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원기 9)에 총부가 건설되었다. 목조 초가 2동 17간이 최초의 건물이었다. 이해 4월에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8월에 당시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에 총부기지를 확정했으며, 9월부터 건축을 시작하여 11월에 최초의 건물을 완공한 것이다.
 이로부터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총부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우리는 물량적으로 거대한 확장을 가져온 총부를 볼 때 마다. 초창기 총부 건설의 그 정신을 새롭게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 대낮에도 도둑이 도끼를 들고 행인을 괴롭힌다하여 盜峙마을로 불리웠던 황무지에, 우리의 선진들은 몸과 마음 다 바쳐 아낌없이 인생을 불살랐다.
 글자 그대로 무아봉공의 전무출신 생활이었다. 순수한 희생정신에 바탕한 제생의세의 수도생활은 마침내 오늘의 총부를 가져왔고, 道治마을을 도치마을로 바꾸어놓았다.
 생활이 어려워 엿장수를 해야 했고, 만석 평야에 논을 갈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단함이 오늘의 교단을 생활종교로 발전하게 한 것이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를 중심으로 모든 선진이,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일심합력의 대 단결력을 발휘했다. 「나」와 「너」는 한 마음 한뜻으로 「우리」가 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지만, 현연보다 더 두터운 법연이 있음을 증명했다.
 혈인 정신을 이어 받은 그 무아봉공의 정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교단은 반세기에 이 처럼 큰 발전을 했고, 황무지 개척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부강하게 한 새마을 운동으로 결실했다. 또한 일심합력의 단결력은 총력안보의 의지로 굳게 맺어졌다.
 53년 전, 우리의 선진들이 힘차게 휘두르던 총부 건설의 망치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귀에 쟁쟁하게 들여온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만석평의 논을 갈던 선진들의 그 의지가 우리들의 핏줄 속에서도 꿈틀 거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편안함을 도모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명예를 회책하고, 분열을 조장하려는 그 부조리들을 과감히, 정말 과감히 물리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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