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혈심 고마운 뜻으로 만나준다면

농촌인구의 도시 집중적 이동이 현저해짐에 따라서 농촌의 농업인구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요즈음 우리 농촌에는 기회만 있으면 새 일자리를 찾아 향토를 벗어나서 산업도시로 이사하여 버리는 바람에 미처 팔리지도 못한 채 떠나버린 집들이 정작 빈집으로 버려져 있는 웃지못할 현상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다.
농촌인구의 도시 집중 이동화의 현상은 경제적 후진국으로 하여금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필연적 추세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도시 인구의 과밀과 농촌인구의 격감이라는 심한 사회적 불균형 상태는 이것이 과연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지 예측을 불허하는 가운데 그 포만과 허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일종의 취약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미 농어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교당들도 이러한 격변하는 상황에서 물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본다. 사실상 우리 교단은 그 발상지 자체가 왜 정치 하의 이 나라 피폐하고 낙후된 농어촌이었고 그 교화의 많은 발걸음이 또한 농경 사회를 찾아가 거기에서 중생들과 애환을 함께 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지금도 상당수의 교당이 농촌을 지켜주고 있고 대부분의 농촌 교당이 농사를 해 오고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농촌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 농촌 교당들도 교화의 방향에 있어서 무엇인가는 새로운 좌표가 설정되어야 하고 그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당면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향리의 흙에 남아 살고 있는 농촌 인구의 분포 상황은 물어볼 것도 없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라 하며 이리하여 농업 일손의 태부족현상과 아울러 읍면 혹은 리동 단위의 초· 중· 고등학교의 정원 미달로 인한 통폐합의 여건마저 연구 검토되고 있는 난감한 현실에서 우리 교당의 처지인들 정상적일 리 없다. 말하자면 기성교당으로서 교세의 감퇴가 눈에 보이게 속출할 뿐 아니라 남은 교세마저도 저마다 나름대로 소득 증대를 위한 벅찬 작업에 밀려 정례예회를 거르게 되는 사례가 허다한 실정이라 하며 따라서 교당 자체의 유지나 그 기본적 생계마저 위협을 당하는 형편이라 하는데 이에 대한 근원적이고 획기적인 과감한 시책이 아니고는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산업화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다 흔적 없이 수용할 수 있으며 또한 여기에서 그 올바른 지향을 자신 있게 향도해 줄 수도 없다 할 것이다.
교정원은 2대 말인 돌아오는 원기 72년까지 국내 일천 개 교당과 해외 백 개 교당을 설립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계획은 아직 발표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 원대한 교화의 구상과 아울러 농촌 기성교당과 개척교당의 지원 육성은 중요하고 시급을 요하는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세워진 교당의 활성화를 기약하는 계기에서부터 우리 교단이 지향하는 교화의 발전은 보다 순리적이고 그리고 두루 통하는 탄탄대로를 스스로 성실하게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농촌 기성교당과 개척교당의 육성방안을 제시하자면 그것은 별다른 방법이랄 수도 없다. 그것은 이미 우리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건전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자매결연을 실시 확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한 교당은 한 지역사회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교화의 장은 국한이 없는 한 바다와 같다. 우리들은 모두가 한결같은 방향과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명을 깨닫고 무한히 트인 이 한 바다가 온통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서로의 뜨거운 혈심과 고마운 뜻으로 만나준다면 어려운 일이 없고 안 되는 일이 없다 할 것이다. 한 일 한 일터라는 궁극적인 자각, 여기에서 취약 교당의 어려움 그 고통을 공동체의 몸부림으로 우리들은 마땅히 수용하여 그 아픔을 나누어가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취약교당들로 하여금 완전한 자력을 얻도록 까지 교화정책상 획기적인 지원 육성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들에게는 어떤 명목으로든지 잡다한 부담을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 의무적 교금 이외의 어떠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은 아들에겐 무리이며 매우 힘겨운 일로서 자력이 서지 않는 처지에서는 먼저 자력이 서지기까지 자립 자활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셋째는 취약교당 자체가 스스로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원동력이란 다른 데 있지 않다. 농촌교당은 바로 그 자체로서 농민의 화신이어야 한다. 교당으로서 언제나 초연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의 그 모습 그대로가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는 그 삶의 현장 그 일속에서 자발적 창조적으로 사랑을 보여주고 생명의 역사를 구현하는 그러한 원동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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