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웅 교도 /원대연 회장
'대종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경계에 부딪칠 때나 어려운 결정이 필요할 때 스스로에게 묻는 마법 같은 주문이다. 일단 주문을 외고 나면 길이 보이고, 어긋나던 마음이 제 갈 길로 돌아오는 신비한 효험을 느낀다.

그러나 이 마법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자리에서 주문을 잊고 길을 헤매는 일 또한 허다하다.

주문이 기억나지 않아 악도를 기웃거리며 괴로워하던 차에 종법사님이 내려준 신년법문을 받들고 나니 이 어린 중생의 마음을 어찌 들여다보신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 중에도 세상의 참 주인이 되라 하신 처처작주(處處作主)의 말씀은 이익 없는 일에 주인의식을 망각하곤 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아는 일에는 스스로 주인이 된다. 공부가 미래의 이익이 됨을 모르던 어린 나에게, 부모님께선 용돈인상이나 장난감 등의 보상으로 내가 알 수 있는 형태의 이익을 주셨다.

대학생이 된 내가 이제 그런 보상 없이도 공부를 하는 것은 지금의 공부가 내 진로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법사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큰 주인'의 삶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그저 원망하기보다 주변 환경을 고쳐나가며 시방삼계를 내 집으로 여기는 진리적 삶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주인이라는 상(相)조차 버리고 국한이 없는 참 주인으로 거듭나 대보은을 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주인으로 인도하는 것이 곧 성자의 심법이라 하셨다. 공부가 이익임을 아는 학생에겐 보상이 필요 없듯이, 시방세계를 위한 일과 나를 위한 일이 결국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 곧 이 심법의 실천이 아닐까. 봉공을 통해 남에게 베풀고, 그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자본주의적인 거래관념도,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 성자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나의 시방세계 안에작은 일에 불과하니 짓고 받는 것에 대한 상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성자의 심법을 실천하며 세상을 밝혀가는 주인들이 많다. 원대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전국 30여개의 원불교 대학생 교우회를 끌어가는 지킴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국의 원불교 동아리는 그 수가 급격히 줄었고, 남아있는 동아리들조차 평균 출석 인원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교우회 사람들은 소수인원이나마 법회를 보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친구를 끌어들여 동아리 등록인원을 채우는 등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자신의 이해를 계산하지 않고 교화·연구·보은을 내 일처럼 여기며, 캠퍼스에 활불의 기운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우회의 지킴이들. 주인과 성자는 다른 세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상 없이 공을 위해 힘쓰는 이들이 곧 공중의 주인이고, 이들의 마음이 성자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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