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었으면!
문학 미술 음악을 소통해야
위대한 예술작품 창작 가능
「들라크로와」문학과 음악 깊이 이해

 화면 가득히 점들이, 그 속에 또 다른, 그 속에 또 다른 점들이 무수히 중첩되어 그려 져 있었다. 아는 사람 흔할 리 없는 뉴욕의 한 방에 앉아 고국에 두고 온 정다운 모습들을 떠올리며한 없는 외로움의 몸짓으로 그 많은 점들을 그렸다 한다 그 점, 「내가 그린 점, 하늘가지 갔을까?」하던 그 점 하나 하나는 그대로 사무치게 그리운 기억의 편린이었을 것이다. 김광섭 님의 시귀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이미지를 똑 같은 제목으로 다시 한번 그림으로 번역한 김환기 님의 작품이다.
 이는 또 유심 초라는 가수들에 의하여 대중가요로도 번역된 바 있다.
 문학이 미술이나 음악으로, 미술이나 음악이 문학으로 그 주관에 따라 다시 번역되는 한 사례이다. 「시는 형태가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태가 있는 시」라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오래 전부터 진지하게 있어 왔던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문학만이 인간의 희ㆍ노ㆍ애ㆍ락을 표현 구가할 수 있었을 뿐, 화가는 장인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다 르네상스를 맞아 여명을 밝히기 시작, 이제는 보카치오나 사케티의 소설에 호가가 주인공으로 등장, 즉 인문주의자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며, 보들레르는 그 당시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악의 꽃」「등대」편에서 루벤스, 다빈치,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퓌제, 고야, 들라크로와 등의 미적 이미지를 다시 시의 형식으로 번역하고 「당신의 영원한 강가에 와서 사라질 이 뜨거운 흐느낌은 진정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 존엄성의 최상의 표징」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들라크로와에게는「들라크로와의 재능의 그 위대한 특징은 문학적이라는데 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항상 성공적으로 고도의 문학지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 단테, 셰익스피어 등을 그림으로 번역하고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세련된 고도의 사상으로 표현할 줄 아는 까닭이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들라크로와! 현대 미술을 예고한 낭만주의의 거장, 영국화가 콘스터블의 그림에 반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을 불어로 번역하던 사람, 같은 낭만주의 사상을 가졌으며 세인들에게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얻은 쇼팽의 연상의 애인 조르즈 상드로부터 「들라크로와는 음악을 이해한다. 그의 감상력은 확실하고 날카로우며 쇼팽의 곡에 싫증을 내는 일이 없다. 쇼팽을 칭찬하며 감상하고 있다. 그러나 쇼팽은 들라크로와의 칭찬을 받아들이며 감격하고는 있으나 그의 그림을 볼 때만은 불상하기 짝이 없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쇼팽은 음악가이다. 음악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사상은 음악의 형식으로서 바겡 표현 할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를 두려워하고 루벤스를 보고는 소름을 돋는다」라고 비교하게 하여 자신의 상상력과 인간성을 돋보이게 한 사람, 그가 26살 되던 해인 1824년 5월 11일의 일기에 「시인이 되었으며!」이라는 간절한 바램을 적어, 그보다도 2년 후에 만날 역시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빅톨위고와의 만남을 가능케 했던 사람, 자연은 하나의 사전에 불과하다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하지만 자신은 다만 인용할 따름이라고 자신의 이론을 정연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 문학과 미술이 밀월 여행을 하고 오히려 시인들로 하여금 재주 없음을 한탄하게 만든 사람, 이치에 맞는 그림보다는 자신의 격정이나 애정으로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미소, 절망의 포옹 등을 표현하였던 사람, 자화상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모든 색은 보색의 그림자를 갖는다는 논리로 뒤에 올 인상주의까지 예언하고 말았다.
<원광대미수대학강사ㆍ「원미」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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