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사님 슬하를 회고하며③
예의지도
일상생활에 예의 염치를 강조
주석에선 상 밑에 빈 대접 준비
「예(禮)는 하늘 이치의 절문(節文)이요, 사람 일의 의칙(儀則)이라 하였나니, 사람으로서 만일 예가 업고 보면 최령의 가치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공중도덕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원불교 예전 총서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 일의 의칙인 예의, 나는 이 대문을 접할 때마다 내가 처음으로 대종사님을 뵙던 14살 때 내 딴에는 큰 선물이라고 생가하며 봉정(奉呈)했던 과자(샘비) 꾸러미를 생각하곤 한다. 이미 이 얘기는「주산종사문집」에 회고한 적이 있다.
나는 어린 마음에 큰 뜻을 품고 정읍 화해리의 본가(本家)를 떠나 이리 총부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른바 14세 출가인 셈이다. 나는 조모님과 부친께서 챙겨주신 노자(路資)를 간수하고 신태인역을 향해 걸었다. 어린 생각에도 생불(生佛)님을 처음 뵙는데 빈손으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선물을 마련한 요량으로 노잣돈을 절약하기 위해 가까운 정읍역을 두고 먼 쪽을 택해 걷기로 한 것이다.
초여름이었다. 신태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역에 닿으니 무엇을 사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역전에서 제일 큰 2층 건물에 들어섰다. 「매월당」이란 과자집이였다. 내 눈에 맨 먼저 띈 것은 과자「샘비」였다. 눈깔사탕이면 고급과자에 속했던 시골뜨기인 내게 샘비는 최고급 과자로 보였다. 노자로 쓰고 남은 돈을 모두 털어 샘비를 한 꾸러미 사들었다. 마음이 흐뭇했다. 나로서는 큰 맘 먹고 사는 과자 꾸러미가 아니던가.
총부에 이르러 대종사님을 뵙고 큰 절을 올렸다. 대종사님께서는 부친의 성함을 묻고, 내게 이렇게 하문했다.
「그래 그 꾸러미는 무엇이냐?」
「예! 대종사님 입맛 다시라고 과자를 좀 사왔습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대종사님께서 폭소를 터뜨렸다. 옆에 앉아 계시던 주산님께서
「시골에서는 입맛 다시라는 말이 경어로도 쓰입니다.」라고 말씀하여 당황해 하는 나를 감싸주셨다.
「응 그래 아무튼 어린 것이 정성이 기특하다.」하시고 이내 시자(侍者)인 광호씨를 불러
「이 샘비 벽장 속에 넣어 두어라. 정용이가 나 입맛 다시라고 사온 것이다.」고 분부하셨다.
그때는 어렵고 당황하여 몰랐으나 뒷날 상기해 보니 하찮은 과자를 흔쾌하게 받다 간수하시던 모습이 내게는 매우 기뻤다.
상상해 보라! 대종사님 전에 선물이라고 내 놓은 것이 신문지 조각에 둘둘 말아 싸서 노끈으로 질끈 묶은 밀가루 과자가 얼마나 초라했겠는가를……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그 질을 생각지 않으시고 오직 어린 아이의 정성 표시를 기특하게 생각하신 것이다.
사람은 때로 작은 정성에도 감각이 큼 법이라, 작지만 그 속에 건네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이 온통 다북차기 때문이다.
그 후 대종사님께서는 예의범절에 관한 설법을 하실 때면 나의 과자꾸러미 선물을 예(例)로 들어 말씀하시곤 하셨다. 내가 직접 들은 것만도 3~4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설법 도중에 청중석에 빤히 보이는 나를 향해
「아! 글쎄 정용이 저 놈이 기특하기도 하지―. 어른들도 그런 생각을 못할 수도 있는데 여비를 탈탈 털어 과자를 사왔더구만. 빈손으로 어른을 뵙는 것은 도리가 아닌 줄을 어린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조모님과 부친께서 총부로 대종사님을 뵈러 가실 때는 항상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하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생불님을 뵈러 가는데 그냥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모님의 그런 훈도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내게 그런 예의차림이 가능했을까? 손자를 본 이 나이에도 어제 일인 듯 자상하기만 했던 조모님의 손길이 떠오른다.
대종사님의 문하에 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조모님의 은혜 때문이다. 어찌 그 은혜를 머리털로 짚신을 삼는다 해도 다 갚을 길이 있을까 보랴. 북망에 누우신 조모님의 유택을 좀 더 편안하게 보살펴야겠고 조모님께서 나에게 걸었던 기대가 헛되지 않게 내 남은 생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아무튼 예의염치를 강조하셨던 대종사님께서는 친히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데도 일호의 불편이나 서먹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잘 조정하셨다.
일제 때였으므로 불법연구회를 찾아오는 관헌이며 손님들이 빈번하였다. 관헌들이 찾아오면 도리 없이 접대자리가 마련되는데 더러 주석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아무리 말단 관리라도 응대하시는 처신이 아주 자연스러워 그로 하여금 어려움 없이 술을 마시고 차린 음식을 즐기게 유도하셨다.
이를테면 권주 잔을 건네면 반드시 반배를 받게 되는 데 건네 오는 잔마다 모두 드셨다. 그런 광경을 어려 차례 당하거나 목도한 바 있는 어떤 분이 최근 추모담을 통해
「대종사님은 대음가(大飮家)였으되 취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연회의 뒷심부름을 도맡았던 내 또래의 학원(學員)들은 주석이 파하고 상을 치울 때 보면 대종사님 상 밑에는 큰 대접에 술이 가득 넘쳐흐르곤 하였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 × 야 찬물 한 그릇 다오」하고 대종사님께서 부르시면 그것이 신호가 되어 우리는 빈 대접을 갖다 드렸다. 손님들은 건네는 잔의 술들이 상 밑 빈 그릇에 옮겨진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제의 말살 정책 속의 험함 세상을 살면서 교문(敎門)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런 처신도 필요했을 대종사님의 심중이 이해가 간다. 나는 대종사님의 그런 심중을 상상하며 문득 일구월심으로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동부서주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김 정 용 법사(원광대 의무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