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수행은 곧 교화하는 양심의 발현이다.
금년 추계교무훈련이 지난 10월20일부터 오는 11월4일까지 약 15일간 중앙훈련원에서 실시된다.   해마다 실시되는 이 가을 훈련은 우리 일선 교무들에게 있어서는 황금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한 해 동안을 교화 또는 교역의 장에서 복잡하고 분주하게 살아오다가 이 한 가을을 기하여 정량한 대기를 마음껏 수용하며 잠시나마 어지러운 심신을 돌이켜보는 수양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고맙고 기특하기까지 한 청복이 아닐 수 없다.
15일간의 훈련기간이라 하는 것은 그리 길지도 않지만 요즈음의 초속도 감각에서는 그래도 상당히 여유를 갖는 공간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의 수행에는 시간 공간의 제약이 있을 수 없다.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동정이 한결같은 그 가운데에 일상이 있고 생활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당위에서 심신동작의 균형  질서는 작용한다.   정기  상시훈련법이 가르쳐 주듯이 재가출가의 공부인에게 일분 일각도 공부의 주체를 저버리지 않고 그것이 늘 생명의 활성으로 끊임없이 승화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공부법의 특징이다.   정기훈련이라 하여 상시의 응용사항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고 상시공부라 하여 정기공부의 특성이 감퇴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공부법은 시공간을 넘어서서 오직 서로 도움이 되고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라 하였다.
구태여 강조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는 자기 스스로가 수행인이어야 하고 또 공부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출가의 공부인이라는 것은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종교의 수도 집단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심성을 작용하고 인격을 갖추는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진리와 자유 평등의 질서가 정착되고 그것이 또한 길이 존중되어야 하는 인류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계발되어야 할 생명의 기능이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제생의세를 서원하고 나선 우리 교화자들에게 있어서 수행의 길은 일체를 선행하여야 할 조건임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우리 교단은 교단 창립기부터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를 제시하고 이 뜻의 정립과 실천을 위한 실지훈련을 실시하여 왔다.   이제 60여년간 이어져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원불교 훈련의 주체적 성격이나 그 합리적인 방법은 변할 수 없었다.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는 원불교 교리의 중추적 골격일 뿐 아니라 이것은 개벽의 새 시대를 열고 새 시대의 정신적 주체를 일으켜 세우는 양대 정초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원불교의 각종훈련은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를 바르게 확립하는 진리관에서부터 보은 봉공의 가치와 기능이 물샐틈없이 그 자체에서 돌아오고 조화하고 성취되도록 그 원천적인 진작을 준비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주  인생을 통한 진리관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는 그대로가 실천윤리에까지 연결되어 활현하는 훈련으로까지 집약되고 구체적으로 생활화하는데 훈련의 목적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미 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정기훈련은 염불  좌선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  상시일기  주의  조행 등의 과제가 주어진다.   이와 같은 다양한 과목이 주어지는 것은 인생 전반에 걸친 물샐틈없는 탁월한 병법으로서 이러한 과정은 원불교 수행의 전통적 표본으로 가위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내외와 시공을 통하여 원융무애한 정도라 할 수 있는 합리성과 진취성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염불과 좌선은 정신수양 훈련과목,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는 사리연구 훈련과목이며, 상시일기  주의  조행은 작업취사의 훈련과목으로서 병행과 활용, 자유와 통일의 원리가 이 원통자재한 훈련에서 또는 자성의 계발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며 이 훈련이 얼마나 값있고 중대한 과정인가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네들에게는 일상생활 그 자체가 곧 공부가 되어 그저 늘상 밥먹듯이 그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다반사와 같은 수행공부가 사실은 그 얼마나 금쪽같은 값을 지니는가를 알게 된다.   인생의 요도  공부의 요도를 밟지 않고는 세상도 인간도 살아날 수 없다.   살릴 수도 없다.   수행과 생활이 곧 둘일 수 없는 체계가 자기 안에서 사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수행은 곧 자기 인생과 교화를 재구성하는 계기이다.   교화자는 중생들 앞에 함부로 설 수 없다.   그가 마땅히 서야 할 조건은 오직 그들 앞에 진정한 자기로서의 그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자아의 진면목이라는 것은 오직 신앙의 표본으로서 수행의 표본으로서의 그 고유한 인격을 그대로 보여줄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스스로의 닦음을 게을리 할 수 없고 이 스스로의 수행이 교화하는 양심의 발현이라는 인식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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