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진 윤리와 혈심의 회복

교단총화의 과제는 실러 여러 가지인줄 안다. 그 중에서도 교단의 전통적 의식의 회복은 교단총화의 원동력이 되는 문제라 할 것이다. 교단 고유의 전통적 의식은 교단사적인 발전원리로서의 저력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야하며 세계적인 온갖 변화를 창조적으로 수용소화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역사의식과 내일을 열어나가는 밝은 생명의 철학으로 그것은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우리들의 생활속에서 활성화 되어야 한다.
원불교교단 전통적 의식의 그 특징적인 일면을 여기에 든다면 하나는 선후진의 윤리라 하겠고 또 다른 한가지는 혈심있는 공인의 윤리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는 선후의 차별도 가릴 수 없는 한결같은 흐름으로서 초창 교단 내부의 정신질서로 의례히 자생하는 것 자재하는 그것이었다. 이러한 소박한 윤기의 흐름은 그 근원을 어느 특정인이 마련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흐름이었고 그 스스로 하는 마음과 행위의 동향이었으니 구태여 이러한 흐름의 역사를 제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짚어보자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 한국 민중의 소박한 얼의 자기실현이라는 의식에서도 연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타율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되는 목적의식에서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자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는 것이다. 여기에 공동체의식의 주체적 의미가 내재한다. 원불교의 윤리정신은 곧 새 시대의 세계공동체 의식의 질서로서 교단형성과 더불어 체질적으로 자생하게 된 새 인간의 궤도라 할 것이다.
지금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원불교인의 의식구조에는 선후진의 윤리나 혈심있는 공인의 윤리가 원불교의 전통적 의식으로서 또는 원불교교단의 보편적인 윤리로서 살아움직이고 있는가, 그 참된 가치가 뜻있는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마땅히 돌이켜 보아야 한다. 물론 원불교인의 저 보이지 않는 밑바탕 그 심연에서는 참으로 저와같은 인간가족으로서 지향하는 공동이상이나 궁극적인 고향감정 같은 그런 소박한 것들이 깔려있고 또 그것이 어느 기연에 따라서는 문득 문득 묻어 나오고 있는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늘날에 있어서의 이러한 일면은 그런대로 아쉬운 여운을 지닌 희소가치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진실을 말한다면 인간 이상과 윤리도덕 부재의 단절적인 고통과 허무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어디있는가 그 여러 가지의 원인은 한가지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복합적인 성질의 것이라고야 하겠으나 그 중대 동인은 잠간 살펴보자면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공동이상이 갑작스레 무너져 버린데서 오는 충동과 단절 그리고 소외를 낳은 그 과도적 몸부림이다.
오늘날의 물질문명은 앞에서도 지적한대로 실로 엄청난 충격과 단절 소외현상을 몰고 왔다. 원불교교조 소태산 대종사는 이러한 징조를 지금부터 70여년 전에 이미 예견하고 새 시대 인류의 공동이상을 그의 대각을 통하여 현창하여 주었으니 여기에서 이 역사적 비극을 극복하고 현대에 도사리고 있는 일체의 정신적 장애물과 부조리를 제거하며 미래지향적인 밝은 전망과 더불어 새 역사 새 세계에 이바지하는 상생의 윤리를 펼쳐 놓았다. 이리하여 이러한 충격과 단절 소외 현상을 근원적으로 평정하고 다스려서 새 생명의 소생발현과 진리관의 확립으로 단절의 고통을 해소하고 인간가족 나아가서는 우주공동체 의식의 자각과 전체적 창조적 자아실현과 봉공을 통하여 소외의 잿빛 안개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원불교의 궁극적인 진리관과 그 근원적인 교법의 정신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교단으로부터 비롯하여 모든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는 아직도 낡은 역사의상극적 기동이 작용하여 평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불순한 기후상황에 대하여 여기에서 더 무슨 긴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엇보다도 새 시대 새 도덕 선진의 고장인 우리 회상에서 우리회상 고유의 전통적 질서인 선후진의 윤리가 보잘것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고 또 무아봉공의 창립정신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교단적 얼의 실체인 혈심이 차츰 그 명맥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일종의 충격과 가슴아픈 반성을 금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정말로 숨이찬 난기류와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면서도 어쩌면 여기는 이다지도 무풍지대와 같은 허탈이 지배하는가. 여기에는 서로의 인간적 정신적인 존중과 깊고 도타운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먼저 부자 형제와 같은 윤기가 건네고야 마침내는 진리와 법을 주고 받을 수 있고 참으로 생사도 넘어서서 시공을 한결같이 꿰뚫는 무한의 생명도 혈심으로서야 끊임없이 새롭게 이루는 것이니 이와같은 교단 전통적 의식의 회복으로서 교단총화의 원동력을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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