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박달식 상임논설위원
해외장학사업의 문을 열다
교포교화에서 본토민 교화로 전환할 때
해외교화 위한 교무양성 세계적 종교바탕
가정과 직장에서 신앙생활 철저히 하며 타자녀 교육실천도 앞장

지난달 서울영등포동에 원불교영등포 보화당한의원이 문을 열었다.
본교에서는 목적사업을 가진 보화당한의원과 원광한의원을 전국 중요도시에 13개소나 개설하여 개교이념인 제생의세의 이념을 구현하여 가고 있다.
한의원 개설은 산업기관으로서 얻어지는 이익금이 목적사업에 쓰여지는 것과 아울러 영육쌍전의 교리에 바탕 육신병을 치료하며 정신과 육신을 함께 구제하는 큰 뜻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전국 중요도시에 한의원이 13개소나 개설된 것은 본교 한약업계가 45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다져온 신용과 전통으로 발전하는 교세와 함께 새롭게 의미지어진다.
이번 영등포 보화당한의원도 해외교화를 위한 해외교무 양성을 목적으로 사직교당 오이균 교도회장의 특별한 서원으로 문을 열었다.
개원 봉불식에서 교령 박장식법사는 영등포 보화당한의원의 개설의의를 두 가지로 들었다.
하나는 이제까지의 한의원 개설이 목적사업에 따라 교단 관계기관이 세운 것이었으나 영등포보화당은 재가교도 개인이 설립하여 교단 목적사업을 후원하게 된 점이며 또 하나는 이제까지 목적사업들이 국내사업들이었는데 해외교화를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영등포 보화당한의원은 세계종교로 발돋음하고 있는 본교의 미래를 밝게하여 주는 하나의 청신호임에 틀림이 없다.
아직 개인 1개월도 넘지 않은 영등포 보화당에서 영등포 보화당한의원을 설립한 오이균 회장을 만났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덤덤히 술회하며 육성장학사업은 그가 이제까지 마음속에 간직했던 꿈의 실현이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바쳐 일해야 할  필생 사업이라 했다.
오회장은 대산종법사로부터 해외장학사업회 이사장직을 수임받고 이에 필요한 정관이 교육부에서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해산의 꿈 실현
전국에 퍼져있는 보화당한의원들이 모두 독자적 목적사업을 두고 개설되었읍니다만 영등포 보화당은 특히 해외장학 사업이라는 원대한 목적으로 개원이 되었습니다. 해외장학사업의 큰 뜻을 세우게된 동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 듣고 싶습니다.
제 고향이 함경남도 안변으로 1.4후퇴 때 단신 월남했습니다. 고등학교만 나와 안변철도청에서 근무할 때 6.25사변이 터졌지요. 국군이 진격하여 올 때 제가 청년단장을 하였는데 갑자기 후퇴를 하니 고향에 있는 부모와 처, 자녀 셋과 생이별하고 내려와(32살)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하며 오늘을 이루었으나 못배운 것이 한이 되어 언제든 장학사업을 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첫발을 이제 내딛은 것은 되겠습니다만 국내 장학사업도 할 수 있을텐데 해외장학 사업을 하기로 서원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5월 애엄마(51세  이순성화)가 열반하였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지 안했으면 넘기기 어려운 고비였습니다. 월남하여 만나서 그 고생을 다 겪고 겨우 살만하니 죽었지요. 저는 영산성지에 내려가 5일간 긷를 했습니다. 부인의 명복도 빌고 제 자신도 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때 이제성교무(당시 사직교당 교무  현 하와이교당 교감)가 대호법의 큰 뜻으로 공부하라는 내용의 기도문을 지어주었습니다. 기도를 끝마치고 마음에 자신을 얻었습니다. 이제부턴 내가 마음먹어 왔던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완도에서 정양중인 대산종법사님을 찾아뵈옵고 해외교화사업의 후원의 일을 하명받게 되었습니다영등포 보화당의 운영은 어떻게 됩니까.
경기도 과천(제2종합청사 옆)에 개인 소유 2천9백평을 교단에 희사하여 이를 기반으로  해외재단을 발족시키고 해외교무 양성을 위한 기금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과천땅이 아직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 3년후쯤 활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해외교무 양성사업은 시급하고 하여 우선 작은 규모이지만 영등포 보화당을 개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영등포 보화당의 이익금은 어떻게 활용할 계획입니까.
과천땅이 아직 묶이여 있으니 1단계로 영등포 보화당 자체를 키우고(3년정도) 다음단계로 해외장학 사업을 전개하겠습니다. 1단계가 지나면 과천땅이 활용시기가 될 것이므로 이 시기가 되어야 해외장학 재단은 명실상부한 사업을 추진하고 전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해외장학사업의 구체적인 계획은 어떻게 마련되고 있습니까?
우선 교역자중에서 해외교화에 뜻이 있고 자격을 갖춘 인물을 선발하여 정책적으로 선정된 미국, 일본, 중국 등 나라에 현지 유학시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교포상대 교화에서 본토민 교화로 전환하는 적극 교화의 뒷받침을 할려고 합니다.
과천땅의 기대가 큽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오회장님의 뜻대로 해외장학재단이 운용되었으면 합니다만 아직 과천땅이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아쉽습니다.
지금은 좀 어렵지만 꼭 지키고만 있으면 그 땅에서 나온 이익금만 가지고도 1년에 몇억원씩 해외장학 재단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대산종법사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EMt을 키워주시기 위해 저에게 해산이라 법호까지 주신 것 같습니다
노랭이와 장학사업
자수성가한 인물들이 대개 종교에 대하여 배타성을 띄우는데 오회장님은 본교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돈독히 할 뿐 아니라 해외장학 사업이라는 큰 일을 시작한 것은 회장님의 삶이 새롭게 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안써도 될 돈을 써본일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노랭이입니다. 가난하게 살 때 동대문에서 상점을 하나 했습니다. 잘못하여 알거지가 되어 4만원짜리 사글세 방에서 살때였습니다. 빚쟁이가 찾아와 벽을 찬 것이 구멍이 나자 집주인은 방을 비워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엄동설한인데 자녀들을 끌고 거리에 나 앉아야 할 처지인데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은 후 젖이 없어 애엄마(부인)가 젖을 먹여주기로 하고 그해 겨울을 그 집에서 서러웁게 보냈습니다. 당시 애엄마가 장남을 낳은 후라 젖이 있었지요
일상생활에서 경제철학(?)이라고 할까하는 신념이 있으십니까.
안쓰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나갈때도 좀 일찍 집에서 출발하여 택시 타지않고 걸어서 갑니다. 또 쓰지 않고 걷는 동안 마음도 챙기지요. 사업상 자가용이 있지만 지금도 그리 급하지 않은 일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교당신축 후 신심나
회장님이 본교를 만난 인연은 언제였습니까.
지금부터 10년전(원기 57년) 당시 사직교당 교도부회장이던 이창길씨(현 동래교당)를 새벽산책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제가 삼청공원 산림보호 대장으로 있어 공원의 식수 수목등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삼청공원에 관련된 20여개 단체가 협회를 만들면서 친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언행이 달라서 가까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사직교당에 인도되었지요
교당의 첫 인상은 어떠했습니까.
불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본교의 한 종파거니 했는데 박청수교무(현 강남교당)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새로운 종교이구나 느끼고 입교를 결심했었지요.
사직교당 신축에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만.
교당건물 신축을 추진하다 교도회장이 열반하고 교도부회장이 부산으로 이주하자 집짓는 경험이 있는 제가 교당건축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교당이 준공되자 교도회장이 되었습니다. 교앙을 지으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신앙심이 깊어진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집에 법신불을 봉안하여 놓고 조석심고와 좌선은 거르는 일이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저를 위해서 빼지않고 합니다. 예전실행으로는 가정의 모든 제사를 합동제사로 하루에 모두 모시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저의 이런 신앙생활을 좋게 받아들여 줍니다
용심법을 가르쳐
제가 알기로는 회사 청소부 자녀 2명을 가르치고 계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회장님의 생활은 신앙생활 하기전과 어떻게 달라진 것 같습니까.
회사(부동산업  농장) 직원들이 13명 있는데 옛날에는 이들에게 상하의 관계에서만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 뒤부터 교당에서 배우고 익힌 용심법으로 대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주니 직원들도 옛날과 다르게 변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자기들 의견에 맞지 않으면 반발도 하고 겉과 속이 다르게 저를 대했는데 이제 이들도 교당에서 배운 법을 전해주니까 좋아하고 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행동이나 말이 옛날과 달라졌으니 그들도 감화를 받을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청소부 자녀 장학금은 제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장학사업의 조그만한 시도였으며 타자녀교육의 실천으로 생각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씨가 되어 이번에 큰 서원을 세우게 되었고 그 출발을 한 것 같습니다.
전무출신 했으면...
평생 간직했던 꿈의 실현을 위하여 첫발을 내딛었습니다만 남은 여생에 또 꼭 하고 싶은 일 있습니까.
해외장학재단 잘 키워 해외교화 적극 돕는 일이 마지막 사업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지어 놓은 것이 조금 더 있다면 장남(오흥식씨  부인과 함께 미국에 유학중)이 6~7년후 귀국하면 사회의 모든 인연을 물려주고 전무출신 하고 싶습니다. 아직 이야기하기는 이르지만 마음은 그렇습니다.
오회장을 아는 교무나 주위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이야기한다.
사석에서라도 자기가 한번 이야기 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책임을 지고 약속을 어긴 일이 없으며 교당사업을 하거나 남을 도와준 후에는 그 일 자체를 잊어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입교 이후 외국에 나가거나 사회의 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한 외에는 법회와 기도에 빠지는 일이 없고 특히 법회시간에 늦어본 일도 없이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
가족관계로는 부인은 열반하고 1남4녀를 두었는데 모두 출가하고 현재 막내딸(오애숙)과 둘이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첫발을 내딛은 해외장학 사업을 위한 영등포 보화당한의원이 번창하고 과천에 심어놓은 해외재단의 꿈이 꽃피어지길 오회장의 염원과 함께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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