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평 제2방언 주역
송대에 머물려 후진들 지도

정관평 제 2방언을 담당했던 형산() 김홍철 종사를 12월의 선진으로 선정합니다.
 형산 김홍철 종사는 1902년 영광 길룡리에서 태어나 원기 72년 12월 15일 중앙총부 원로원에서 열반했다.
 형산은 소년시절 천지공사인 방언공사에 합력하라는 대종사의 말씀을 받들어 방언공사 일을 거들면서 회상창립에 동참했다.
 형산의 나이 18세 되던 원기 4년, 아버님인 팔산은 형산에게 가사를 맡기고 전무출신의 길을 나섰다. 형산은 이때부터 출가하는 원기 15년(29살)까지 10여년간을 가정경계를 되살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형산은 원기 9년 이보응화 정사와 대종사의 주례로 영산지부에서 결혼해 원불교 혼례1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원기 15년, 형산은 마침내 그렇게도 염원하던 전무출신의 길에 나섰다. 3개월간의 동선을 마치고 총부 농업부 감원으로 근무했다. 간고 했던 초창기 교중 살림과 주경야독의 고된 생활이었지만 주경야독의 고독 생활이었지만 형산은 대종사를 모시고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괴로운 줄을 몰랐다.
 원기 17년, 총부 농업부장에 임명됐다. 당시 농업부는 3년동안 겹치는 수해로 1천원의 큰 빚이 있었다. 형산은 3년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려 빚을 갚고 선원에 책상 1백여개를 마련했다.
 형산은 보화당 총무로 1년 근무후 원기 20년 신흥교당 교무로 가게 된다. 형산은 이곳을 우리의 교법에 바탕해 경제적으로 잘사는 마을을 만들 염원으로 대부분이 교도인 지역주민들과 새 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전국 농촌진흥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돼 표창을 받기도 했다.
 원기 23년, 형산은 신흥교당과 이웃하고 있는 이흥과원 주무로 발령 받아 8년여를 봉직하면서 김근수김정관이선우김성현 등 많은 전무출신들을 배출했다.
 원기 40년 10월, 형산은 정관평 재 방언공사 추진위원장으로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재 방언공사는 원기 43년 12월 완공됐다. 형산은 그후 6년여를 영산에 머물면서 공사를 마무리했다.
 형산은 원기 49년 원광사 사장고 총부 예감을 거쳐 원기 63년 총부 교령으로 추대됐다. 이후 형산은 성산과 송대에 거주, 수양에 전력하면서 후진들에게 큰 힘을 밀어주었다. 저서로는 후진들에 의해 원기 79년 팔산형산 종사문집이 출판됐다. 원기 32년 수위단원에 피선됐고 원로수위단원을 역임했다. 법납 57년, 공부성적 정식출가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이다. 이달에 열반한 선진은 박광전 김영신 송혜관 장적조 유허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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