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의 치료 통해 발심나고 신심 깊어져

내가 살았던 김제군 청하면 절골마을은 10여가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남편이 부여 군청에 근무하는 관계로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들의 주례를 서주신 김정용 전 원광대 총장님께서 남편에게 제일목재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이를 계기로 남편은 제일목재에 근무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에 재미를 붙인 남편은 나에게 이사올 것을 권해 3살배기인 큰 아이 경주를 데리고 익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루는 김 총장님 정토회원인 김성윤 사모님이 남편에게 교당을 다니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시부모님이 절에 다니는데 어떻게 원불교에 다닐 수 있겠는가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건강하던 큰 아이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학교도 휴학을 시키고는 전주, 군산, 서울 등 큰 병원을 다 찾아 다녔으나 병명도 알지 못한 채 호전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 때문에 근무조차 충실히 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사모님이 아이를 보러 우리집을 찾아왔다. 가족 전부를 입교시켜 입교증 및 원불교 관련서적을 가지고 오셨다.
 이때가 원기 64년 6월이었다. 그런데도 원불교 다닐 마음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김 총장님은 병원만 다니지 말고 원광대 한방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다며 박호식 원장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큰애를 데리고 한방병원을 찾았다.
 박 원장님은 진찰을 한 후 조금이라도 열이 내리면 나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이야기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으나  박 원장님을 뵈온 이후 6개월동안 계속 침을 맞혔다. 천우신조일까. 골수염으로 판명 된지 4개월만에 큰 아이의 다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나는 발심을 내고 교당을 다니게 되었다.
 교당에 들어서자 여자 교무님들의 단정한 옷매무새와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교당에서는 백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지성으로 법신불전에 기도하면서 비로소 편안한 심경으로 생활 할 수 있었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이 법을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아이가 원심회 활동을 열심히 한 것과 둘째 딸 덕주가 정토회원이 된 것에 감사를 느낀다. 무엇보다도 교구 자원 봉사대원, 독경반 반장을 맡고 있는 동안 은혜를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리교당> 이혜진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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