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한 시대의 양심의 기준

4월7일은 27회째 신문의 날이다. 이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라 할 수 있는 독립신문이 발간된 날로서 이 날을 신문의 날로 제정하였고 더욱 금년은 1883년 한성순보가 창간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 그리고 유엔은 1983년 금년을 세계 언론의 해로 정하는 등 우리의 신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면에서 여느때와는 다른 감회를 갖게한다. 그래서 올해 신문의 날 표어도 언론의국제화라 정한 것을 보면 서로가 내외로 회통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세계언론화나 언론의 국제화의 이상과 그 지향성이 지니는 바탕은 다 한결같은 생각 또 한결같은 소리다. 먼저 우리의 신문부터서 세계적 선진적 커뮤니케이션의 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오늘날 신문이 공기라 할때 그것은 마땅히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전세계적 공정성과 보편성을 보여주고 실현하여 주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언론으로서의 세계적인 공편성과 진실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로서는 이미 그리고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내재적 솔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언론의 생명이요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비판정신의 기준이기도 하다.
세계가 하나되는 시대의 그 뜻으로 이 시대 언론의 성격과 지향성 그가 나아가 수행해야할 사명은 이제 자명해진 셈이다. 세계가 한 집안 한 울안으로 좁혀져가고 있고 인류가 한 형제 한 권속으로 화해가는 이 마당에서 이제 스스로 그렇게 되어가야 하는 뜻(진리)을 일깨워주고 씨뿌려 주고 이를 선도해 나가는 여기에 세계언론의 해가 나아가야할 새 역사의 한 길이 있다 할 것이다.
더구나 언론은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자임하여온 것도 오히려 당연한 긍지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언론은 그 어떠한 입장에도 그 누구의 편에도 함부로 치우치거나 편벽되이 자행자지 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진리가 행하는 방향으로 한 시대의 양심의 기준은 정립되고 아울러 우리들이 다같이 이러한 양심들을 가꾸어 가지고 서로 함께 살아나가는 인격적 공동체의 반영으로서 신문의 궁극적인 기능 작용은 끊임없이 세우고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문은 한 시대의 등불이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공동의 인격체로서 스스로 제안을 다스리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되고 모두가 다함께 추구하는 세계적 이상을 제시해주는 작업도 눈부시게 벌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하겠다.
우리 신문은 지난 1세기동안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오면서도 그런대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률이라는 것이 다른분야나 또는 이른바 세계적 선진수준에다 놓고 비교해볼때 과연 긍정적인가. 특히 정신적인 방향이나 의식의 면에서 그 성장도는 바람직한 것이 되는가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른 기술향상과 잘도 어울리는 언론환경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며 비판정신 그 안목의 세계적 수준은 지금 손색이 없고 가능한 것인가도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더욱 언론의 국제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신문 앞에 대두된 과제들은 사실상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적으로는 신문기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전문화하는 일, 신문제작 시설을 고도화 하는일이 있다. 신문인의 자질을 향상하고 전문화를 위한 재교육등 부단한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신문의 제작기술이 고도화의 체제로 발달돼가는 데에도 신문내용에 있어 정당한 정신차원의 지반(비판기능)이 성실치 못 할 때에는 주객전도가 되어 그것은 타락이다. 오늘날 신문기자는 일반적인 지식만으로 지식과 정보가 보편화되어가는 현실여건을 극복하고서 민중을 제도할 수 없고 오로지 전문화를 통해서만 요긴한 정보를 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유통의 원활화와 비판기능의 자유로운 신장은 언론국제화 시대를 여는 최선책이기도 하다. 더욱 우리 신문은 앞날을 내다보는 신문으로 진리의 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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