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가 동참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뜻

요즈음 우리 회상에 훈련원이 세워지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 훈련원은 아마도 각 교구마다 하나씩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총부의 중앙훈련원을 위시하여 대구교구의 동명훈련원과 광주교구의 소남훈련원에 이어 이번에는 전주교구의 만덕산 훈련원이 준공되고 7월26일 대산종법사 임석하에 성대한 낙성 봉불 대법회를 가졌다. 서울 부산 청주 제주등 모든 교구들도 이미 훈련원 후보지가 마련되어 있어 잇따라 세워지리라는 전망이다.
종교의 발전을 교세나 건물 시설등 물량적 팽창을 앞세워 도모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하는것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이 땅의 도시 농촌 할것없이 방방곡곡에 무슨 종교의 웅장한 건물들이 시새워 들어서서 판을치는 것을 지켜보는 뜻있는 이들의 냉정한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존경쟁이나 하는듯이 치닫고 있는 오늘날의 종교 작태가 이 사회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로서 시민으로서 흐뭇하게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사뭇 못마땅하고 곤혹스럽고 심지어는 말세의 현상으로까지 미친다 하니 문제는 결코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등속의 문제의식을 지금 당장 우리교단에다 적용시킬 필요는 물론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양심으로서 한 종교인으로서 마땅히 자기의 허물로 반성하여 마지않을 충분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교세를 내세워 집단이기주의적 체제나 강화하자는 것이 무슨 종교이겠는가.
엄청나게 집이나 지어놓고 그것이 신앙의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과시하려드는 것이 무슨 종교이겠는가. 사실상 종교의 목적이 생존을 위한 사치스런 수단으로 변질되고 전락되고 있다는 것을 어떠한 변명으로써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진정한 종교의 발전이라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종교의 발전은 곧 총체적으로 인간과 사회전반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문화로서 성숙한 그 체질과 인격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혼자만이 아니고 저희들끼리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인격과 정신이 그 생명생활이 그 문화가 살이 찌는 것이고 이것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라나며 그 성장사를 꾸며나가는 것이다.
그 성장사가 꿈틀거리며 헤쳐나가며 구체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목마른이에게 생수가 돼주고 길 잃은이에게는 길이 돼주고 사랑을 잊은 이에게는 사랑이 돼주고 맹인에게는 눈이 돼주고 귀먹은이에는 귀가 돼주고 다리가 없는 이에게는 다리가 돼주고 마음을 잊은이에게는 마음을, 고향을 잊은 이에게는 인간을, 양심을 잊은 이에게는 양심이 돼주는 이러한 생명을 되찾고 더욱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작업이 아니고는 종교는 오로지 구도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마침내는 그 자신으로서 지닌 보편적인 본질로서 기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제1의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라면 그것은 구원의 성취이며 세계가 하나되는 뜻(일원)으로 공동체의 진리와 그 사랑 생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무아의 마음으로 주는 봉공일 따름이다. 그것이 교세라는 세력으로 주름잡고 물량적 허구를 가지고 사람의 혼을 사로잡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상생의 길이되고 공생의 바다로 아우러지는 것이라야 한다.
지금 여기 만덕산 훈련원을 비롯 근래에 새로 세워진 우리 교당들이나 훈련원을 두고 하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우리들의 처지에서는 교화적 의식주의 한계에서 필요불가결의 조건으로 분수에 벗어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들의 일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적극적인 자세로 이소성대와 그 원리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이 전체가 동참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훈련원 또한 전체의 원력이 여기 바탕하여   으로 원불교 훈련의 바른 생명이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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