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ㆍ신앙의 생애
聖路헌수사업이 전국에 확산되기를 염원
일원의 진리를 자기 삶이 원동력으로 삼아

 일생을 교육의 현장에서 영재를 기르기에 전 생애를 바쳐왔고 일원의 진리를 신앙하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인격을 함양해 온 광주교당 민원종 고문님(65세).
 금년에 발족한 광주교구 영산 성지 성로 헌수사업 추진위원회장이기도한 민 고문님은 세상의 온갖 비리와 오염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진실을 밝혀 참다운 삶이 되기를 기원하는 신념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주위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영산 성지 성로 헌수 사업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영산 성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입니다. 청운회 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청운회원들과 성지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대 영산선원장님께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하고 여쭈었는데 도로가 포장이 안되어 큰 애로를 겪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또한 낯모르는 사람들이 그곳에 왔어요. 그래서 비로소 도로 포장에 대한 일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고 바로 전남도지사를 만나 협의, 여러 가지 어렵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86아시아 종교자 평화 회의에 참석한 외국인들의 방문 3일전에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만고일월」성비 뒤쪽이 너무 허전한 것 같아 청운회원들의 노력으로 동백나무 72주를 심었었지요. 그리고 금년에 다시 성로 장업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성지가 가까운 광주교구에서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여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가로수로는 드문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이 수종을 선택한 뜻이 있습니까?
 ▲성로는 다른 길과 다르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이  길에 들어서면 성로인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고심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각 터인 노루목이 느티나무 숲으로 이루어 져 있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고 수명이 긴 느티나무라 2-3백년쯤 지나면 거목으로 성장하여 성지 주변 정화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지금은 광주교구 교도들의 작은 정성으로 성지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앞으로 성로 장엄사업이 전국 각 교구에 확산되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이 헌수사업을 하기까지 조원욱 교도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 그루에 적어도 5만5천원 하는 나무를 2만5천원씩 가격을 조절했고 고사된 나무는 보충해 주기로 약속을 하는 등 애를 많이 썼지요. 식수한 수령은 거의 18년 생입니다.
 -그런데 언제 입교를 하시게되었는지요?
 ▲저는 출생부터가 불연이 깊습니다.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신 어머님께서 절에 많은 불공을 올리신 후 늦게 야 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종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강의하는 도중 아침가지 정정하셨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불효에 대한 한이 사무쳤고 만 분의 일이라도 보은하기 위해 「반야심경」을 조석으로 외웠지요, 이때 시작한 독경은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불교에 나가게 된 것은 아내(박성학)가 나도 모르게 원기 53년도에 입교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법회를 보러 가지는 않았지요. 그렇다고 거부감을 느끼거나 회의를 느껴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교당에 꾸준히 나오시게되었습니까(?)
 ▲그러니까 입교하고 얼마 뒤부터 가끔씩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80년도 학원사태가 일어나 총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고 보안대에 가서 취조도 받는 등 착잡한 심경으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당시 발타원 교구장님께서 오시어 「원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 자신이 처한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일단 숭산 총장님을 뵙자고 하시어 총부에 갔었지요.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82년 3월부터 원대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숭산 총장님은 총장회의 때마다 만났었고 각별히 챙겨주시어 가깝게 모셨던 터라 그렇게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 후 해직교수들 복귀 때 전남대학으로 오게 되어 누구보다도 숭산총장님에 대한 죄송함 때문에 늘 마음에 걸려 보은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활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신앙심은 싹텄고 현실세계의 부조 지를 체험하고 더욱 진리적 종교의 신앙생활에 심취하게 되었지요. 교전을 통해 새롭게 이러한 세계가 있었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고 새로운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총부에 세워지게 되는 「소태산 기념관」에 모셔질 聖畵제작에도 많은 관여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만....사실은 제 고향이 전남 영암입니다. 일본에서 한국의 긍지를 드높였던 왕인 박사와도 한 고향으로 제가 「황인 박사 유적사업」회장을 보게 되었는데 기념관에 왕인 박사 생애를 통해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4폭의 그림을 양인옥 화백과 정승주 화백에게 의뢰하여 장엄하였습니다.
 어느 날 효산교구장님을 모시고 「신우회원」들과 함께 욍인박사 기념관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효산님께서 「화백들을 잘 아느냐」고 하시기에 「잘 안다」고 대답했는데 그 후 총부에서 여러 어른들이 오시어 보신 후 「개교정신」과 「방언공사ㆍ혈인 성사」이렇게 두 폭을 두 사람에게 맡기게 되어 중간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끝가지 잘 성사기 되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지요?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이 공부 이 사업에 보다 알찬 참여가 있기를 소망하고 아직은 알 수 없는 성리공부를 위해 정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교직생활에서 퇴임하게 될 때 더는 강단에 머물지 않으려고 합니다. 깃들 때와 떠날 때를 분명히 해서 명예교수로 남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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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 총장에서 평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일호의 불만 없이 교육에 정열을 쏟았고 일원의 진리를 자신의 삶에 원동력으로 삼아 신앙하고 수행하며 봉공하는 교도님이며 경제학박사이기도 한 민원종 고문님. 등산이 취미이고 해탈의 마음을 길들이는 적공으로 「일원상서원문」을 독경하는 일은 일상생활 속의 큰 부분이 되었다. 이제 이 법으로 스스로의 수행은 물론, 교단이 필요로 하는 일에 온 정성을 모아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하신다.
<박혜명 편집국장>
<광주교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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