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과 원자력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서 입증되고 납득되어야 믿는다는 과학적 태도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학적 태도는 잘못하면 사견을 조장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견이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상식적인 것은 광신적으로 믿으나 그 참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것,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의심하며 절대로 믿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한 현상의 실상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거나 그이 구조나 그 기작이 어떻게 되어 있는 가도 납득되지 않고, 더욱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지만 믿을 것을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믿는 모습이 아닐까.
 다르게 표현하면 이성으로 납득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직관으로 어떤 것을 믿어야 한다고 정하여 믿는 마음이다.
 이 직관력을 양성하는 것이 수양이며, 해석적으로 아직 단정할 수 없는 것도 적극적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信은 있되 解가 없는 자는 무명을 조장하며, 해는 있되 신이 없는 자는 사견을 조장한다」는 열반경중의 귀한 말씀이 가슴을 친다.
 용기를 내서 믿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없고, 충분히 입증되고 납득되는 것만을 믿는다면 의혹만 쌓이고 쌓여 혼탁과 광란이 판치는 불행한 세상이 올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계하고 경원하기보다는 신뢰와 애정으로 진솔하게 대하고, 다소 害를 입을 지라도 주저하지 말고 믿음을 심어 주면 그 사람은 새로워지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교육, 상담의 장에서도 상대를 신뢰하며 냉정하게 나를 앞세우지 않고(無我) 상대방을 받아들이면 和와 利가 성하게 되나 의혹이 앞서고 불신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신뢰와 존경이 없는 무질서한 난투 장이 되어 대학의 기능은 마비되고 파멸의 수렁으로 질주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신뢰성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작은 공리만을 따지다 보면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큰 자혜는 信을 가르쳐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내재하고 있는 불성을 발굴하는 방법 즉 「불성개현의 길」밖에 없으며, 인간의 불성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학생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과학자이며 원불교교도인데, 선생님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말이다.
 원자력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이며, 참으로 「고제」그것이라 생각된다. 원자력의 탄생은 世紀의 대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박사가 「에너지와 물질은 等價이다」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입증함으로써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에서 물질이 에너지로 변화할 때 엄청난 量의 에너지를 발생한다는 것이 계산으로 예견되었다. 그 후 미국의 물리학자가 이 이론을 기초로 신형폭탄을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실험 결과 이론과 일치했으며 드디어 원자폭탄이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兵器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구상의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이 원자력이라는 것이 이 지구의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힘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생활하는데 석유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이 석유의 매장량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새 에너지원을 찾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원자력이다.
 인류의 死活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 병기로 사용되면 인류는 일거에 파괴되어 버린다는 모순, 「苦諦」가 현실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원자력의 문제가 아닌가.
 원전의 안정성 문제는 예민한 문제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실정인데 얼마 전에 국제 원자력 기구의 기술평가단은 국내에서 논란이 되어 왔던 전남 영광원전 3ㆍ4호기의 안정성을 평가한 결과 안정성에 이상이 없다고 평가하고, 안전센터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확율론적 평가 법을 도입할 것을 권고 한 바 있다.
 원자력은 절대로 안전한 것이라 보증할 수 있는가 하면 유감스럽게도 절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원자력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제행무상」이며, 모양이 있는 것은 언제나 가는 변하는 것이다. 원자력이나 장치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최선을 다하여 삼중, 사중의 안정장치를 시설함으로써 상당히 안전하다고 하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전장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안정장치가 파괴되면 어떻게 하느냐, 계속해서 점검하고 보수하며 안전장치가 틀림없이 재 구실을 할 수 있게 점검한다하더라도, 인간은 과오를 범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인간의 과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태도」를 「믿는 태도」로 돌려야 하며 원자력을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원자력은 안전하다」고 믿는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믿어버리면 담당하는 기술자의 불성이 개현 되어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발심이 생겨 설계 제작 보수관리에 정성껏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원전기술자의 불성 개현의 조건이 있어야 만이 절대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의혹과 불신풍조가 판을 치면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해 볼 때이다.
 지로 이해하는 노력은 어디까지나 해의 시작에 불과하다.
 믿는다는 것은 지에 의한 이해와 동시에 그 사람의 주체적인 결단 여하에 달려 있다.
 의심하여 진리를 확인하려는 태도가 과학이라면, 믿어버리는 주체적 결단에서 종교가 시작된다고 본다. 의심만 하고 정하지 못하면 이 세상 모두가 塞하게 될 것이다. 「원불교 교전」의 말씀으로 맺는다면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疑)과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信) 그리고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분)이 갖추어지면 이 세상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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