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과 원자력」이란 칼럼을 읽고 -

 믿음도 어리석은 믿음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 하고 의심도 어리석은 의심을 기우라 한다.
 옛날 중국에 미생이라는 청년이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처녀를 기다리기 위해서 다리 밑에 서 있다가 마침 소나기가 와서 냇물이 불어 무릎에 닿고 가슴에 닿아도 약속을 지키느라 자리를 옮기지 않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는 고사에 연유하여 미생지신이란 말이 생겼다 한다. 그런가 하면 기 나라의 한 젊은이는 방에 누어 천정을 바라보니 천정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 또 근심을 하게 되었다 한다. 이처럼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을 기우라 하였다 한다.
 불성을 믿듯 전기 종사자들의 능력을 믿어주자는 김재백 논설위원의 칼럼을 읽고 그간 원전에 대한 염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은 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도 설마 설마 하다가 미생의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다시 문제를 제기해 본다.
 우리가 원전에 대한 경각심을 깊이 갖게 된 것은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한 뒤부터라 할 수 있다.
 원전 측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안전성을 설명하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나라며 원자력 산업의 선진국인 나라들에서 실제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났다. 미국의 원전은 그 사고가 1조 분의 1도 훨씬 못 미치는 확률임에도 사고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나라 원전이라고 아무리 그 불성을 밀어준다 해도 사고의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라는 법이 있을까ㆍ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작은 국토에서는 체르노빌 같은 대형사고가 난다면 피할 곳도 없고 평상시에 약간의 누출만 된다해도 인근주민들의 직간접의 방사능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이다.
 인류가 직면해 있는 에너지자원의 한계문제며 화학원료로 인한 공해문제 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최선의 선택이라는 주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발생하는 피해는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어서 진행중인 원자력 계획은 결코 좌시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원전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소광섭 교수(서울대 물리학과)를 만날 기회가 있어 상의하였더니 그 분야는 고윤석 박사(서울대교수)가 전공이니 자문을 구하는 게 좋겠다 하여 상의한 적이 있다.
 고 박사님의 이야기는 『학리 상으로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기계를 다루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가부를 쉽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는 내용의 설명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안전하고 그 사고의 확률도 일조 분의 일도 못 미치지만 그 확률이 현실로 나타났으며 그 피해는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세계 각 국에서는 원전계획을 수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고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전반대의 입장을 무조건 반대자들로 보거나 대안 없는 이상주의자들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발전중인 원자력의 경우 더욱 안전성을 촉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제3의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소박한 말처럼 원자로에 의지하는 한 대체에너지의 개발은 적극성을 가질 수가 없다. 원전도 본래는 없던 것이다. 없던 것이 새로이 발견되어 실용화되듯 제3의 에너지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거리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호화 시설들이 소비문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전력은 산업발전에도 소요되지만 이 소비문화의 촉매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63빌딩의 하루전력소비는 강원도의 하루소비량과 비슷하다하니 앞을 다투어 건설되는 대형호화 빌딩의 전력소모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이 소비문화는 정말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 요즈음의 온갖 부조리와 사회악의 온상이 잘못된 소비문화에서 기인된다고 볼 때, 이제는 욕망의 고비를 바로잡고 바람직한 절제된 생활문화를 정착 시켜 가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되겠다.
 한전은 앞으로의 전력 수요를 감안해서 원전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하고 있다. 소비문화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존을 담보로 해야 하는 꼴이 되고 있으니, 어느 곳에 안심하고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ㆍ 이러한 생각이 기우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미생의 꼴이 될 것만 같아 다시 문제를 삼는 것이다.
<총부 영산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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