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자 ㆍ 공죄인으로서의 역사적 참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제 한 밤만 새면 새해라 한다.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도대체 묵은해니 새해니 하는 수작부터가 부질없는 애착의 관념인 줄은 알면서도 작년에도 그랬고 금년에도 또 어김없이 그렇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언제부터인지 알게 모르게 익혀온 버릇이라는 것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가 보다. 묵은해가 어디 있고 새해 또한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우리들이 저마다 살아가는 길인데 무엇이 어찌하여 묵어가고 무엇이 어찌하여 새로워진다 하는가. 흐르는 물은 끊임이 없다 한다. 흐르는 물을 누가 어찌하는가. 흐른다는 것은 그  흐름으로서 그대로 물일 따름이며 스스로 하는 그의 성질이다. 도도히 흐르는   大海長江 에다 누가 금을 그을 수 있겠는가. 여기 생명의 대하에는 時 ㆍ 空도 생 ㆍ 사도 다만 저 만고의  푸르름으로 무르녹아 저마다 한 빛이 되어 자유의 물결을 이루어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이 스스로 나서는 우주적 생명의 대하에서 자기가 자기를 다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아우러져서 서로가 함께하는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나가고 있는 이 공간 이 장소는 자연의 땅, 자연의 환경이겠지만 역사적 시대적인 상황으로는 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 한 시대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써 자연으로서의 존재이유와는 자못 다른 의미를 저버리지 못한다.
가령 매년 짓는 농사는 당년에 흉작을 맞는다 해도 명년에 가서 다시 잘 지어 곧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역사의 사건에 있어서는 자연의 순환과 같이 무위도 순리도 아니다. 물론 궁극적인 뜻으로는 역사나 시대라고 하는 환경 그 자체기 대체적으로 대자연 ㆍ 인과의 속성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한결같이 어둡고 괴로우며 복잡하고 끈질긴 것이다. 오늘날 역사적 시대적 삶의 양상, 그 존재방식이라는 것은 냉전 음모 투쟁 상극 갈등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집단 이기주의적 자기 방어라는 엄청난 실력과 능력의 차원이 아니고는 도저히 자기 자신을 부지하고 지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이 시대를 헤쳐 나가는 상황논리로 되어있다. 이러한 요청은 약자나 약소국가의 처지일수록 더욱 강렬히 나타나는 것이고, 정의 인권 평등 평화의 논리는 강자나 강대국들의 균형 있는 경쟁과 무력 확보의 기선을 통해서만 좌우되고 있다.
갑오 동학혁명을 기점으로  우리 한반도 역사의 기운은 마침내 세계의 풍운을 이 땅에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일 노일의 兩戰役과 한일합방 제정노서아의 몰락과 소련 공산혁명에 이어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계급투쟁의 만연, 1 ㆍ 2차 세계대전, 8 ㆍ 15해방과 남북분단, 6ㆍ 25동란 등, 대충 살펴본 것만 해도 이른바 근대이후 백년 혹은 이백년을 두고 이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는 끊일 사이 없이 점철되어 왔고 오늘날 대국적인 평화의 소강상태는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나 아직도 종족 종교 지역간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이기주의의 상극과 투쟁은 국지적으로는 치열한 상태로서, 금년 9월과 10월에 걸친 KAL기 사태 버마 랭군 사태 레바논 사태가 몰고 온 세계적인 일련의 충격만 하더라도 아마도 그것은 인류사상 그 유래도 찾아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반도덕 반문명의 작태라는 인류양심의 지탄을 면할 수 없다.
이제 와서 곰곰이 돌이켜보건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제가 지어서 제가 받는다는 이 단순한 원리, 이 너무나도 자명한 법칙 하나가 작용하여 오늘날에는 전 우주적 생령을 다 바치고도 어쩔 수 없는 이 말 못할 죄업의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들은 여기서 다 같이 공업자 ㆍ 공죄인 이라는 자체를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계적인 죄업 앞에 세계적인 참회로써 스스로 서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궁극적인 양심의 자세다. 이 진리와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한마음 원천수를 길어 올리는 작업은 늘 끊임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공생하는 길 自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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