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는 새로운 결의

우리는 원기 69년, 갑자년의 새해를 맞았다. 구랍부터 신정을 향해 내내 내려준 瑞雪은 산과 들을 한결 청신한 자락으로 덮어주어 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에 빛과 안온한 기쁨을 더해 주는 듯 하였다.
내일이라고 해서 어제와 별반 다를것도 없는 것이지만 오늘 아침에 떠오른 해를 새해로 마지하며 세시의 돌아옴을 따뜻하고 고마운 심정으로 지니고 간직한 소망과 祈求를 펼쳐 나간다. 이것은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아니하고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다 다를것이 없는, 그 누구나 그 어디에서나 세세년년 되풀이 되어온 우리네 인간의 습속(세시풍속)으로서 금년이라고 하여 또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네가 펼쳐나가는 새해 祈求속에는 물론 묵은해의 쓰라렸던 고난이나 그 업장이 극복되고 소멸된 것은 아니며 새해에 거는 소망 역시나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어떠한 예증이나 보장도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네들은 사람으로서 살아나가는 본연의 도리를 다하는 양 흐뭇해 하는 것이다.
더구나 금년은 갑자년이라 한다. 갑자는 말 할것도 없이 십이간지의 시작으로 육십갑자의 그 첫해에 해당한다. 역학을 믿는 민간에서는 갑자년의 운세가 몰고 올 길조를 풍성하게 전해주는데 그런대로 들어두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갑자 쥐해는 한마디로 크게 「吉」하는 해, 그야말로 왕운이 떴다고 한다. 작년의 쓰라렸던 상처도 씻은듯이 아물어버리고 평화와 풍년이 깃든다고 내다본다. 그 근거로는 세 가지의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10월 윤달부터 색다르다는 것, 둘째 입춘이 음력 1월과 12월 두 차례나 되며, 셋째 우수가 또한 음력 1월과 12월 두 번이나 있어 신기하고 한마디로 운수대길이 금년의 대운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운수풀이를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새삼스럽게 무슨 대운에나 크게 의존해 보자는게 아니라, 터무니없고 엉뚱한듯해서 오히려 좋고 아무런 조건없이 마음에 부담을 주지않아 거저 좋은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이와같은 운수 풀이식으로 나타난 것은 실은 역사의 大河, 그 흐름으로 이어온 민중의 말없는 소망이 그 이면에는 맥맥히 스며있는 사실을 읽게 한다. 우리네 민중이 바라는 것, 祈求하는 내용은 엄청나게 크고 거룩하다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작고 단순하며 모두가 다 한결같이 쉬운 일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 사람답게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으로서 너와 내가 함께 아우러져 사는 것을 원하고 있다. 정도와 순리를 따라서 평탄한 걸음걸이 조용히 주고받는 인정의 대화와 그 숨결속에서 살아가자는 것이 우리네 민중의 소박한 바람(소망)이다. 궁극적으로는 평화의 바다, 그 흐름으로써 민중의 삶과 그 원력은 끊임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평화 그것은 민중의 至願이다.
갑자 새해는 민속적으로 자못 상서로운 뜻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교단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는 것이다. 원불교가 이 땅(익산 총부)에 정착한지 6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결의를 다져 항상 밝은 새 해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슬기를 모아야 한다. 대산 종법사는 신년법문에서 「지금의 세상은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오는 교역기라 폐쇄에서 개방으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눠졌던 것이 하나로, 강급에서 진급으로 향하는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되었다」고 설시하고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이 종극적인 질문을 이 역사와 만생령에게 던져 저마다 스스로 이 구경의 절실한 물음에 대하여 정말 바르고 명확한 대답을 얻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가치 질서가 무너지고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 이 마당에 새로운 肇判으로 새로 시작하는 궁극적인 결의는 더욱 분명한 것이 아니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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