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자각과 바른 결단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대산 종법사가 신년법문에서 제시해 주신 이 시대를 살아나가는 세계 모든 인류의 공동주제라 할 것이다. 무엇을 믿고 살고, 무엇을 위해 일을 하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짐즛 말은 하지 않아도 궁극적으로는 그 어떠한 목표와 방향을 스스로 지니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보편적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이와같이 지극히 보편화된 상식과 당위를 거론하고 문제삼는 것은 좀은 새삼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하게되는 이 보편적인 이상이라는 것은 언어 이전에 이미 자기의 마음속으로 간직하여온 자생적인 삶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마다의 저절로의 물줄기가 이 골짜기와 저 골짜기에서 모아들어 마침내는 큰 흐름으로 하나의 바다를 이루어 간다는 것,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그대로의 삶일 따름이다. 하물며 중생이 살아나가는 목표나 방향이라는 것이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그 누구의 뜻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목표와 방향을 지칭하는 저 이상이 과연 어느 먼 곳에서 빛을 놓아 조명해주는 그 빛 속의 황홀이 아니라 바로 제가 지닌 저마다의 다원적인 얼굴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어 주는 것이다.
보다 그 실체에 대한 비유는 물과 같은 것, 공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기속에서 살면서도 물속에서 살면서도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물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무지 무한이어서 손바닥에 잡히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그러고 말고 할 가치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바로 물이고 공기이기 때문인가. 실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들이다. 상식의 차원에도 못 미치는 이야기 꺼리다.
좀 더 구체적인 층으로 들어가서 한번 따져 보자. 자기 자신이 항상 나와 더불어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참 나를 모르고 있다. 가정이라는 것, 사회라는 것, 나라 세계, 인류라는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할 본질적인 것, 생명의 가치라는 것이 모조리 상실되어 가고 있는 판국이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 생명의 가치가 사라져 버린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것은 그마저도 알맹이가 없는 호도와도 같은 빈 껍질의 꼴이 되어가기 마련이어서 여기 이 마당에서 부터는 새로운 조판, 새로운 시작이 아니면 안된다. 「내 지팡이 하나 꽂을 한 조각의 땅도 없다」(乾坤無地卓孤ㆍ)더니 이렇듯 우리들은 여기에서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되돌아 서야할 찰라의 시간도 한치의 공간도 이제는 허여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듯 세기말적인 풍조는 아직 세계도처에서 풍미하고 있다. 종교 전쟁을 위시하여 이데올르기 ㆍ 종족 집단이기주의적 경제전쟁등 편견 아집 이기주의의 충돌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보다 가공할 것은 여기 생존의 무대인 지구가 무너져 가고 있고 생명의 실체인 자연이 시들어가고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소강상태인 세계평화의 유지마저도 서로가 절대적 살상무기인 핵무기의 폭력을 앞세우고서야 겨우 가능하게 된 형편이라 하니 현대문명의 극치는 그 초점의 방향을 어디로 돌리고 있는지 자못 주목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각이 우리들로 하여 스스로 바로 서고 바른 결단을 일으키게 하는 소임을 다해야 한다. 전체가 아우러져 하나되는 믿음으로 하나되는 삶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그 하나되는 꿈, 그 하나되는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 하나되는 진리, 그 하나되는 생명, 그 하나되는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요 상생이다. 지금 우리들은 은혜와 상생의 그 바다로 조용히 돌아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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