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교당 김덕일화씨
공사와 대의를 생명처럼
13명의 他자녀 교육에 정성 다해
성실한 봉공인, 내생 전무출신 서원

『처음 입교해서 법명증 받았을 때처럼 기쁜 날(원기 53년 8월 23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일찍이 이 법을 알았다면 재가살림 하지 않고 전무출신 했을 텐데……』
성실과 근면, 보은 봉공의 신념 하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타인에게 돌리는 보람으로 세월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군산교당 김덕일화님(73세).
무보수 군산 원광유치원 원장으로서 천진한 어린이들과 대화하며 항상 밝은 미소와 자상한 손길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다. 하루의 일과가 교당에 출근하는 일로부터 비롯하여 유치원으로 다시 교당에 들려 그날의 교도들 애경사와 제반공사에 참여하여 일손을 돕고 있는 덕일화님.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는 일 없이 무의미하에 살다 갈 인생인데, 어찌 다행 이 회상을 만나 영욕고락의 원리와 불생불멸의 진리를 알게 되었는지 아슬아슬합니다. 다만 공부와 사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만이 유감이지요.』
대덕군 기성면에서 오빠 셋을 둔 큰딸로 한의원을 했던 부친 밑에서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여고졸업 후 왠지 결혼이 하기 싫어 의과대학에 가려고 했었는데 부친의 열반으로 포기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덕일화님은 25세에 권덕천씨와 결혼하여 첫 아이를 복부수술로 실패하고 이후 출산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원광대학에서 열린 초교 교장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남편이 「절에 다니지 말고 원불교에 다녀보라」하시면서 군산에도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라 하시어 그때부터 원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군산시내에서 30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지만 가끔 시내에 나와 둘러보다가 교당을 발견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로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 무안해 돌아 왔지만 그 후로도 가끔 갔었지요. 그러다가 일요일 법회에서 참석하여 처음으로 법설을 듣고 일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전을 살줄도 모르고 시내 서점가만 찾아다녔던 덕일화님, 불전헌공도 몰라 어느 날 백 원을 들고 불단으로 올라가서야 유지비봉투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듯 어렵게 인연을 맺고는 자신의 생활 모두를 봉공으로 탈바꿈하였다. 의식주에 대한 최소한의 절약생활로 친척 아이들 열세 명을 초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교육하여 他자녀 교육의 이념을 실현해 나갔고 일 년이면 순교로 신발이 몇 켤레씩 닳아진다.
교도부회장으로서 정신, 육신, 물질로 온통 다 바치고 사심 없이 일하는 덕일화님은 교도와 교무의 중간 역할자이기도 하며 그 정의로움과 통솔력에 누구하나 신뢰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교도가 없다. 아직도 재래식 부엌구조 그대로 생활할 만큼 자신 개인생활은 최저로 낮추고 모아진 돈은 교당의 급한 빚을 갚았고 아무도 모르는 헌신 헌공의 모범을 보여준다. 내생 전무출신서원 일념으로 칠순이 넘은 노구에도 아랑곳없이 발령장 없는 재가교역자의 사명을 다하기에 한 순간도 무료히 보낼 수가 없다. 틈틈이 교전을 봉독하며 좌선과 염불, 기도의 빈틈없는 수행인의 생활로 정진하신다. 언제나 시계처럼 정확한 발걸음으로.
[박혜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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