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으로 보은사업
- 이 성 신 ⑧
농촌 일손 돕기는 연중행사로
김연지행씨의 특지로 「그림대종사」발간
첫 요인훈련 실시 … 한문야학도
대구교당 6년
섬마을 돕기

간혹 교도생일이 되면 교당에서는 BBS회원들을 교당으로 초청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다소의 위로가 되고 따뜻한 인간애를 건네려는 것이다. 농촌 일손 돕기로 하는 벼 베기 작업은 연중행사였고 일일찻집을 개설하여 그 이익금으로 섬마을을 돕기로 했다.
이런저런 활동이 경북도경찰국에서 사회봉사부문 시상을 할 때 원불교가 상을 타기도 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교세에 따라 교구제가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서 나는 최초로 일일 교구요인훈련을 시도하였다. 원기 60년 7월 4일 14개 교당요인 1백30여명이 대구교당에 모여 처음으로 ①신앙수행생활 ②교당유지 ③교화 ④법회 ⑤교도친목 등을 주제로 설정, 단별토론 시간을 가졌다. 이날 훈련에서 가정에서의 교리실천 문제와 의식을 통한 교화문제 등에 대해서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초입교도관리 등에 대한 요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교당간의 유대강화를 통한 행사계획 촉진 등을 적나라하게 토로했다.
이때의 이 훈련이 교단 요인훈련의 비롯됨이라고 생각된다. 이 요인훈련을 마치고 바로 이어 직장법회를 개설했다. 구극 직물고장에서 공원들을 위한 교양강좌로 이원경 부교무와 교대로 했다.
또 8월에는 영산 삼밭재 마당바위에 급수시설을 하게 되었다. 교도들과 함께 성지참배를 하는 중 삼밭재에 올라 옹달샘 비슷한 우물을 보니 불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현장에서 교도들은 우물시설과 휴식처 시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돌아와 20만원의 공사비로 추진했던 것이다.
한편 어린이를 위한 「그림대종사」를 김연지행씨의 발원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교화부장이었던 이광정 교무는 어린이교화를 하려면 「교전」만으로는 안 된다고 목마르게 호소했었다. 이때 연지행씨는 평소 어린이 교화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고 염원하던 일이라 어려움을 안고 단독으로 출판비용을 지원, 교화부에서 발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기 60년 9월 1일자로 대종사 탄생으로부터 대각까지의 모습을 만화로 그린 「그림대종사」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대종사 일대기의 제1권이며 출판 비용은 2백만 원이었다.
어느 날 연지행시는 기차 속에서 낯모르는 어린이들이 「그림대종사」를 펼쳐 놓고 읽으면서 「이 책은 대구 김연지행씨가 했단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연지행씨는 「평생에 그렇게 기쁜 때는 없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기도행렬
어린이 훈련은 매년 실시했다. 제2회 훈련에서 93명이 참석했는데 나는 그대로 끝나서만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이 합동득도식을 개최했다. 8월 17일부터 2박3일 동안 대구교당에서 합숙훈련을 마친 어린이들이 30여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와 1백30명에게 처음으로 법명이 쓰인 교도증을 받게 했다.
이날 어린이들은 10개항으로 된 「원불교 어린이헌장」의 준수를 받고 촛불을 각자 켜든 채 긍지를 다지는 발원문을 읽고 법신불전에 4배를 올렸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어린이들이었다.
어린이는 나라와 교단의 기둥이라 새로운 어린이 교화의 장을 열어 성인교화의 활력을 삼으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이렇게 어린이 교화를 하면서 원기 61년 4월부터는 중고등 학생들에게 매일 한시간식 한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합창단을 창단, 90여명의 단원을 구성하였다. 10월부터는 대명동에 출장법회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봉불식을 올렸던 것이다.
나는 대구에 주재하면서 특별한 애로나 힘든 일이 없었다. 처음 부임 당초에 느꼈던 2대 교무의 어려움도 모른 채 현장교화에 여념이 없었다.
밖으로 봉공활동과 대내외사업 그리고 안으로 끊임없이 줄을 잇는 교도들의 기도행렬 속에 세월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했다. 기도의 힘은 무어라 측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정인화씨의 신기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나의 대구생활을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정인화씨는 어느 해인가 정초 3일기도에 참석하게 되었다. 평소 기도에 대단한 정성이 있던 분인데 기도 이틀째 되는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심고 드려라」하는 외침소리에 깨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정인화씨는 외손자 백일잔치를 보러 상가아파트에 사는 딸집에 가게 되었다. 눈을 뜨고 보니 연기가 가득했다. 문을 열었을 때는 딸이 경영하는 양장점에 불이나 양장지에 불이 옮겨지려는 찰나였다. 정신없이 물을 붓고 소화를 한 후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이 화재는 딸이 다리미를 꽂아놓고 빼지 않아 누전된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위기를 모면했는데 주위에서는 「할머니가 지성으로 원불교에 다니시더니 생명을 구했다.」고 하여 입교도 많이 했고, 이것이 기연이 되어 대현교당을 창설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던 것이다.
<법사 ㆍ 군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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